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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손에 놀아나는 日 주가·환율 

Global Monitor 2015년 지방·총재 선거, 2016년 총선 겨냥해 금융시장 개입 강화 

오상용 글로벌모니터 에디터

World 도쿄 금융가의 ‘관제시세’


일본의 주요 정치 일정 : 2014년 9월 개각과 당 지도부 교체 2014년 10월 후쿠시마현, 11월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 2015년 4월 지방 선거 2015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 2016년 7월 총선
관제시세(官制相場). 최근 일본 도쿄 금융가에서 자주 회자되는 단어다. 관(官)에 의해 한층 노골적으로 금융시장 가격이 통제되고 있는 최근 시장환경을 다소 자조 섞인 뉘앙스로 일컫는 말이다. 이런 양상은 일본의 정치 일정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장기 집권 계획에 맞춰 내각지 지율을 떠받치는데 금융시장이 활용돼 왔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주가 상승-엔 약’라는 시장가격 지표로 아베노믹스의 성과를 포장해왔던 그간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관제시세는 사실 일본국채(JGB)시장에선 1년 반 가까이 진행 중이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의 등장과 BOJ의 한층 강도 높은 양적·질적 완화정책(QQE) 도입 후 일본의 국채금리는 지속적으로 억눌려왔다. 국채시장에 한정되나 싶었던 직접적 가격 통제는 최근 들어 외환시장과 주식시장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외환시장에선 ‘BOJ의 돈 풀기가 엔가치 하락을 불러온다’는 전통적인 ‘시장 인식 조작’ 단계에서 벗어나 직접적인 관제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당국의 입김 하에 있는 연기금과 우정기금 같은 공공기금이 손발 역할을 하고있다.

몇 가지 사례가 있다.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말레이항공기가격추당한 바로 다음날인 7월 18일 도쿄 외환시장 움직임을 보자. 간밤 지정학적 리스크가 고조된 만큼 개장 전부터 이날의 달러-엔 환율은 하락 쪽으로 즉, 엔 강세 쪽으로 방향이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며칠 내 100엔이 깨질 거라는 전망도 개장전부터 파다했다. 그리고 장이 열렸다. 정 반대의 상황이 전개됐다. 엄청난 달러 매수 주문이 밀려들면서 달러-엔 환율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엔의 강세 전환에 베팅한 세력들은 정오가 되기 전 항복을 선언하고 만다. 당시 엔 환율을 방어한 세력은 연기금들로 알려져 있다. 1시간 30여분에 걸쳐 수천 억엔 규모의 달러 매수 주문을 집중시켜 상대 진영의 전의를 꺾어 버렸다. 당시 시장은 달러-엔 환율 100엔 붕괴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당국의 강한 의지가 연기금에 의해 관철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8월 8일에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 이날은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라크 반군(IS)에 대한 공습을 승인한 날이다.

역시 지정학적 위기감으로 엔은 강세로 돌아설 게 뻔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엔 강세에 베팅한 세력들은 민감한 환율대에서 고배를 마시고 만다. 이날 대규모 달러 매수로 엔의 급격한 강세 전환을 막은 세력은 우정금융 산하 간보생명이었다. 현지 언론들은 해외 자산 비중을 늘리려는 연기금과 간보생명이 달러가 쌀 때 외채 매입에 필요한 달러를 매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도쿄환시의 베테랑들은 이런 설명에 코웃음을 칠 뿐이다.

큰 폭의 엔 강세 전환이 예상되는 시점이면 어김없이 공공기금이 등장해 ‘엔고 세력’을 꺾어버리니, 관제시세가 국채시장에서 외환시장으로 확장됐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도쿄 증시의 경우 관제시세라는 용어 대신 ‘PKO’라는 단어가 자주 쓰인다. 여기서 PKO는 유엔의 평화유지활동(PeaceKeeping Operation)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프라이스 키핑 오퍼레이션(Price keeping peration) 즉, 시장 가격 유지를 위한 공공자금(일본은행+연기금+우정그룹 자금 등등)들의 활동을 말한다. 도쿄 증시에 이 단어가 등장한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최초 등장했던 시점은 1990년대 초 연기금을 동원해 주가를 직접 방어하기 시작한 무렵이다. BOJ는 이미 상장지수펀드(ETF) 매입을 통해 주가관리를 해왔으니 그렇다 치고, 올 2분기 들어선 BOJ 못지 않게 연기금의 활약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닛케이 225지수가 민감한 지수대를 뚫고 내려가려 하면, 혹은 단기 조정폭이 커졌다 싶으면 어김없이 연기금의 PKO가 작동하고 있다. 4월에는 닛케이225지수의 1만4000선 방어에 투입됐고,7~8월에는 1만5000선 방어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연기금의 주가 방어가 두드러지면서 9월 공적연금(GPIF)의 포트폴리오 변경(일본국채 비중을 줄이고 주식 및 해외 자산 비중을 늘리는 게 골자)에 대한 시장의 기대도 한층 커졌다.

‘주가 상승-엔 약세’로 아베노믹스 성과 포장

관제시세가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정치 일정과 연결지어 생각해야 한다. 유권자들의 표심을 살펴야 하는 아베로선 주식시장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9월 3일의 개각은 아베의 장기 집권(6년)을 위한 포석이다. 개각과 당 지도부 교체 과정에서 보은 인사를 통해 아베의 당내 지지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개각 후 임시국회에선 지역활성화 법안과 저출산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며 정책 운영의 축을 경제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집단자위권 행사를 둘러싸고 양분됐던 국론을 잠재우고 내각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행보다.

이 같은 전략은 ‘지역창생’이라는 슬로건 하에 진행되고 있는데 내년 4월 지방 선거 승리를 향한 물적 토대 만들기라고 보면된다. 지방선거 승리는 내년 9월 아베의 자민당 총재 재임을 위한 발판이다. 내년 9월의 총재 선거는 6년 장기 집권을 위해 아베가 반드시 넘어야 하는 관문이다. 이를 통과하면 2016년 7월 총선이 기다린다.

단기적으로는 오는 10월 후쿠시마현 지사선거와 11월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더구나 이번 개각과 당 지도부 교체에서 헛물을 켠 중진 의원들 사이에선 반(反)아베 정서가 자라날 수 있다. 연말에는 예정대로 소비세 추가 인상을 단행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단행한다면 국민적 불만이 커질것이고, 연기하면 재정의 신뢰 상실로 국채시장이 출렁일 거라는 식자들의 우려가 커질 거다.

이런 모든 난관을 순조롭게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아베는 잃었던 국민적 지지를 서둘러 복구해야 한다. 그간 아베의 지지율을 뒷받침했던 것은 아베노믹스에 대한 기대감이었으므로 주가와 환율을 떠받쳐서라도 아베노믹스의 ‘매직’이 작동 중이라는 환상을 국민들에게 계속 심어줘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일본은 경제가 좋아져 주가가 오르는 게 아니라 주가가 오르는 것을 보면서 경제도 좋아질 것이라는 착각 속을 헤매고 있는 중이다.

예기치 않은 해외발 악재 땐 충격파 클 수도

시장 플레이어들 역시 이 같은 정치 이벤트를 시세 상승의 동력으로 삼으려 들 것인데 그 이면에는 아베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로다 BOJ총재가 있기 때문이다. 흔히 BOJ의 당면과제를 ‘2년 내 물가목표 2% 달성’으로 알고 있지만, 상기한 정치 일정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2016년 7월(총선)까지 지금의 양적·질적완화 정책을 지속하는 게 아베 총리의 솔직한 바람일 것이다. 때문에 일본의 물가는 구로다의 양적·질적완화 정책 중단을 앞당길 만큼 너무 빠르게 올라서는 안 되며 오히려 천천히 오르는 게 아베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정치 일정과 맞물린 관제시세 심화는 장기적으로 경제 주체들에게 더 큰 부작용과 위험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공공기금이 뒤를 받쳐준다는 믿음에 주식 투자자나 외환시장 플레이어, 대출자 모두 과도한 위험을 감수하는 경향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공공기금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해외발 충격이 밀어닥치면 이들 모두가 막대한 손실을 입고 마는 것이다. 무엇보다 BOJ의 공격적인 완화정책이 아베의 권력욕구 때문에 계속 연장돼 잠재 위험이 누적돼 간다면 아베 이후 등장하는 정책 입안자들은 그 후폭풍을 어떻게 다 감당할 것인가. 어쩌면 그들은 아베와 구로다보다 더 극단적인 선택에 내몰려야 할지 모른다.

202404호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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