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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 - 내전(內戰) 상처 딛고 일어서는 르완다를 가다 

“ 곡괭이 하나로 벼농사 ‘기적’ 일궈냈어요!” 

글·사진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한국인 새마을봉사단원들, 자본과 기술 없는 르완다 오지에 ‘희망’의 씨앗 뿌려…가난에서 탈출한 농촌엔 부녀자의 발언권 커지고 아이들 웃음소리 피어나

1 7월 초 벼베기와 탈곡 작업에 한창인 기호궤 마을 주민들. 변변한 농기계가 없는 이 마을은 개간에서 탈곡까지 모든 과정을 인력에 의존한다. 2 동네 아이들에게 벼농사는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통로가 될지도 모른다. 야적해놓은 쌀 부대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손을 흔드는 무심바 마을 어린이들.



“< 호텔 르완다>를 보셨나요?” 아프리카 중부 내륙에 위치한 작은 나라 르완다에 가면 한 번쯤 듣게 되는 물음이다. 르완다의 현실이 이 영화 한 편에 압축적으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르완다 하면 1994년 종족간 대학살, 즉 제노사이드(Genocide)를 떠올린다. 1994년 4월 이 나라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종족인 후투족 출신의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격추되면서 그해 7월까지 약 100일 동안 후투족과 소수 종족 투치족 간 내전이 벌어졌다. 이 내전으로 인해 100만 명이 목숨을 잃고 200만 명의 난민이 생겼다.

하루 평균 1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대참사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투치족이었다. 당시 수도 키갈리의 밀 콜린스호텔(The Milles Collines Hotel)은 물 부족 국가인 이 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수영장을 갖춘 고급호텔로 주로 외국인들이 투숙하는 곳이었다. 이 호텔의 지배인이 학살을 피해 호텔로 피신한 1200여 명의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 난민을 필사적으로 보호했는데, 이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호텔 르완다>이다.

대학살이 벌어진 지 올해로 꼭 20년이 흘렀다. 기자가 찾아간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와 농촌마을 기호궤, 무심바의 그 어느 곳에서도 20년 전의 내전을 입에 올리는 이가 없다. 심지어 ‘후투’ ‘투치’라는 종족을 연상케 하는 단어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현지 관계자들은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종족간 차별과 학살을 떠올리게 하는 발언은 철저히 금기시되고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대신 도시든 농촌이든 어디를 가도 생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의 분주한 삶과 마주하게 된다. 르완다의 국토 면적은 2만6338㎢로 남한의 약 4분의 1 규모이고, 인구는 1100만 명을 웃돈다. 인구밀도가 우리와 거의 비슷하며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는 가장 높다.

국가 예산 40%를 국제사회에 의존

특별히 눈에 띄는 산업이 없다 보니 국가 예산 25억 달러 중 40%에 이르는 10억 달러 정도를 국제사회의 원조에 기대는 형편이다. 그래서인지 수도 키갈리에는 백인과 동양인 등 외국인이 의외로 눈에 많이 띈다. 예산 집행에 종사하거나 관련사업 진행을 지원하는 해외 인력들이 다수 상주하는 까닭이다.

키갈리에는 약 100만 명이 모여 살며 지난해 1인당 GDP 통계는 대략 600~700달러 선으로 알려져 있다. 광물·커피·차 등 주로 수출해서 번 돈으로 쌀 등의 식량(이 나라는 국토의 대부분이 구릉과 산으로 이뤄져 있어 벼농사가 발달되지 않았다)·기계류·원유 등을 수입한다.

요즘은 경제사정이 많이 나아진 편이라고 한다. 20년 전의 대학살은 르완다 경제에 큰 상처를 남겼다. 한 해 국내총생산(GDP)이 전년도의 절반 수준으로 내려 앉는가 하면 인구의 80%가 빈곤상태로 내몰렸다. 토지는 파괴되고 가축은 속절없이 죽어갔다. 빈약했지만 그나마 있던 사회기반시설마저 파괴되면서 사회·정치·경제 기반이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소수 종족 출신 지도자인 카가메(Kagame) 대통령이 2000년 4월 취임하면서 비로소 혼란이 종식되고 나라의 기능도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국가통합을 내세우고 치안을 확보하는 등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인적자원 양성을 경제성장의 기본 전략으로 정하고 교육과 정보통신기술(ICT) 인프라 구축을 국가 최우선 사업으로 정해 추진 중이다.

농촌 사정은 여전히 막막하다. 대부분의 농민은 특별한 기술도 없이 선조들이 대대로 해오던 영농에 의존한다. 바나나·카사바(전분이 풍부한 열대작물)·옥수수·감자 등이 주력 작물이며, 대부분의 쌀은 인접국인 우간다에서 수입해 먹는다.

하지만 경북도가 파견한 새마을리더해외봉사단(이하 새마을봉사단)의 손길이 닿은 농촌에서는 변화의 물결이 인다. 버려진 습지와 늪지대를 옥토로 바꾸고, 고소득 작물인 벼를 심었다. 농업 기술까지 가미되자 마을의 소득이 껑충 뛰었다. 새마을봉사단은 기호궤, 무심바 두 마을을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지목한다.

7월 초 키갈리에서 남서쪽으로 국도를 자동차로 1시간 30분가량 달려 기호궤 마을에 도착했다. 행정구역상 카모니 지역 무삼비라(Kamonyi District, Musambira Sector)에 속한 이 마을은 260여 가구에 12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르완다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마을에서 도보로 20분 떨어진 습지를 개간해 만든 벼농사 새마을시범농장(15ha)은 누렇게 익은 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을걷이를 하는 한국과 달리 이곳에선 2모작이 가능해 7월이면 벼 수확철에 해당한다. 부지런한 몇몇 농민들은 벼베기와 타작, 건조 작업이 한창이었다.

농사일 돕던 아이 “내년엔 상급학교 갈 거예요”

개도국 농촌이 응당 그러하듯 농사에는 온 가족이 동원된다. 기호궤 마을도 부모가 벼를 베고, 탈곡을 하면 아이들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낟알을 자루에 담아 100여m 떨어진 건조장으로 나른다. 부모 일손을 덜고자 사촌과 함께 따라나섰다는 13세의 여자아이는 키가 또래의 한국 어린이보다 한 뼘은 족히 작아 보였다.

자루 한가득 담긴 곡식을 머리에 이고 제법 먼 거리를 이동하고서도 힘든 내색 하나 없다. 오히려 눈빛엔 기대감이 서려 있는 듯했다. 아이가 기자에게 “아버지가 돈을 벌어 학용품을 사 주시는 등 벼농사를 시작한 이래 우리집 분위기가 아주 좋아졌어요”라며 “내년에는 상급학교에 갈 거예요”라고 말하면서 살포시 웃었다.

르완다 농촌의 초등학교 입학률은 50%에 달하지만 상급학교(한국의 중학교) 진학률은 10%도 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에게 벼농사는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변화의 시작일 수도 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농업협동조합 ‘코다리카(CODARIKA, Cooperative Dvelopment Agriculture In Kayumbu)’의 조합원이다.

경북도에서 파견한 새마을봉사단이 기호궤 마을에 벼농사를 도입했다. 2011년 12월에 시작된 기호궤 마을의 벼농사는 이듬해 5월 첫 모내기를 했고, 8월에 첫 수확의 기쁨을 맛봤다. 현지 농민들이 결성한 농업협동조합이 바로 코다리카다. 새마을봉사단에서 기호궤마을 벼농사를 담당하는 임홍훈 씨는 “7월 수확을 통해 조합원 1인당 12만 르완다프랑의 돈을 손에 쥐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1년이면 24만 프랑의 수입이 생기게 되는 셈인데 아이들의 학비, 의료보험료 등을 충당하고도 남아 가정 경제에 큰 보탬이 된다”고 덧붙였다.

새마을봉사단의 역점사업인 벼농사 사업은 기호궤마을 주민들의 사고방식과 의식구조를 바꾸는 데도 영향을 준 듯하다. 벼농사라는 게 여간 부지런하지 않으면 지속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쌀 미(米)자에 여덟 팔(八)자가 두 번 들어간다고 해서 쌀 한 톨이 나오기까지 88번이나 손길이 간다는 말도 있다. 개간에서부터 논갈이·모내기·피뽑기·농약치기·비료주기 등 중노동의 연속이다.

임씨에 따르면, 벼농사 경험이 거의 없는 현지 농민들은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2012년 첫 수확을 거두고 소득이 생기면서 자신감과 성취감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예전엔 고소득을 보장해주는 벼농사를 하고 싶어도 농지를 조성하는 데 드는 초기 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려웠고, 농사기술 또한 변변치 않았다.




벼농사 프로젝트는 농민 삶의 전환점

새마을봉사단의 도움으로 그런 장애물이 하나하나 걷혔다. 농협을 설립하고, 지방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국유지인 습지의 사용권도 따냈다. 또 벼농사 경험이 풍부한 다른 지역의 농협과 계약을 맺고 기초이론 교육에서부터 농지 개간, 수확, 기술관리, 조합운영에 관한 노하우를 배웠다.

저수지 시설 보강, 논 측량, 수로 건설, 농업 전문가 초빙 등에 드는 비용은 경북도에서 지원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오면서 기호궤 마을의 벼농사는 인근 지역 주민들도 부러워할 정도의 고소득을 거두게 됐다.

마을 텃밭 가꾸기 등 농사 관련 업무에 참여하는 새마을봉사단 우미지 씨는 “벼농사 사업은 주민들에게 소득증대 측면 못지 않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걸 일깨워줬다는 점에서 새로운 삶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주민들은 언젠가 봉사단원들이 떠나고 모든 걸 스스로 해야 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음다 기지마나 코다리카조합장은 “새마을봉사단이 떠나더라도 벼농사 모니터링·수확·창고 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조합원들이 직접 꾸려나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호궤 마을에서는 가축은행사업도 주민의 큰 환영을 받는다. 가축구입이 어려운 농가에 미리 구입 자금을 대출해주고 나중에 나눠 상환케 하는 미소은행 개념이다. 돼지는 1마리에 8만 프랑, 염소는 6만 프랑을 빌려준다. 이 대출금은 2%의 금리를 적용해 1년간 12개월로 분활 상환한다. 이 사업에는 160명의 마을 주민이 참여해 대출 금액도 860만 프랑에 달한다고 새마을봉사단 관계자는 설명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의 환경을 제공하려는 노력도 기호궤 마을 곳곳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마을을 관통하는 황톳길 한 모퉁이의 한 가정집에서는 많은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담장 너머로 흘러나왔다. 비교적 큰 마당에 서너 살 안팎의 유아 20여 명이 부녀자들에게 노래와 춤을 배우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새마을봉사단의 제안으로 이곳에서 시작된 마을 공동육아 사업은 “엄마와 아이들 모두에게 새로운 경험”이라고 이 사업에 참여하는 위톤다 줄리엔(42) 씨가 말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숫자와 단어, 짧은 노래 등을 배우고, 또래 아이들과 놀면서 사회성도 기른다. 아이들의 엄마 10여 명이 2인1조로 돌아가면서 당번을 서면서 아이들을 돌본다.

이 사업은 마을 아이와 엄마 모두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듯하다. 새마을운동이 보급되기 전에는 이런 유형의 육아시설은 없었다. 아이 양육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가 일터에 가거나 외출할 때는 항상 아이를 동반해야 했다. 그래서 집밖에서의 활동을 아예 포기하거나 아이를 집에 방치해두는 경우가 많았다. 공동육아는 기호궤 마을의 부녀자들에게 잠시나마 양육의 짐을 벗고 개인시간을 활용할 여지를 제공해주었다.

위톤다 씨는 “어린아이들은 누군가의 보살핌 속에서 정서적 안정감을 누린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기 집을 공동육아시설로 내놓았고, 새마을봉사단은 이를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깔끔하고 앙증맞은 어린이집으로 재단장해주었다. 위톤다 씨는 “이제 몸을 가누기 시작한 유아들에게 교육을 제공하고 미래를 준비하게 하는 것은 어른들의 의무”라며 “공동육아는 그동안 엄마들이 의식하지 못했던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고 말했다.

이 마을의 10대~20대 청소년들에게는 태권도가 큰 인기를 누린다. 2012년 8월 새마을회관 준공식 당시 마을 청년들이 보여준 태권도 시범은 지역사회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기자가 방문한 때에 마침 이곳에는 승급심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태-권.” 새마을회관 옆에 있는 원형의 체육관에서 익숙한 기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도 키갈리에서 초빙된 르완다인 사범의 카리스마 넘치는 구령에 따라 태극 1장 품새를 시연하는 르완다 청년들의 얼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문명의 혜택으로부터 격리된 기호궤마을 주민들에게 태권도는 색다른 문화를 접하는 통로가 됐다. 현지 사범이 수업을 진행하거나 승급 심사가 이뤄지는 날엔 청년뿐만 아니라 동네 개구쟁이들도 모여들어 성황을 이룬다.

태권도, 청년들의 취업의 문 열다

르완다는 제조업 기반이 거의 없어 젊은이들의 취업 문이 아주 좁다. 오히려 군·경찰·사설 경비원 등 치안 관련 분야 인력 수요는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라 태권도 같은 무술을 익히면 진로 개척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태권도 프로그램을 관리하는 새마을봉사단 라미선 씨는 “그래서 한국 못지 않은 제대로 된 교육을 하고자 강도 높은 훈련,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0년 제 1기 새마을봉사단이 기호궤 마을을 처음 찾은 이래 이 마을 기성세대부터 여성, 청년, 어린이까지 모든 세대가 새마을운동의 영향을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 1기 단원으로 이곳 마을 주민들과 1년 동안 함께 지낸 손대호 씨(지금은 르완다 새마을봉사단 관리요원으로 일한다)는 “현재의 마을의 분위기가 4년 전과는 크게 달라졌다”고 돌이켰다.

손씨는 여러 가지 변화 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발언권 신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에는 부녀자들이 바깥 출입을 꺼리고 외부인과는 말을 나누려 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여성들이 한결 자유로워졌고, 덩달아 마을 분위기도 밝아진 느낌을 줘요. 얼마 전 한국에 들어온 새마을운동 연수단에도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선발돼 왔을 정도예요.”

기호궤 마을을 관장하는 카이랑가 엠마누엘 무삼비라 섹터장(35)은 “새마을봉사단의 활동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10년 뒤에는 아주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며 “새마을운동 세계화 수혜자인 우리 농민들도 자립을 위해 지금부터 뭘 해야 하는가를 깨달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한국이 압축성장을 했다면 르완다 정부는 자체 계획에 따라 적정 속도의 경제개발 전략을 추구한다”면서 두 나라의 경제정책을 비교하기도 했다.

르완다 정부는 2020년까지 인구를 지금의 두 배로 늘리고 경제도 아프리카 중간 수준(1인당 GDP 900달러)으로 끌어 올리는 국가발전 청사진인 이른바 ‘비전2020’을 수립했다. 농업과 같은 1차 산업보다는 2, 3차 산업을 정책의 우선순위에둔다. 부존자원이 빈약하고 제조업 기반이 전무한 이 나라는 부득불 정보통신기술(ICT)과 MICE(회의·관광·컨벤션·전시회)산업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 르완다 ICT 산업의 총아는 무선통신이다. 국도변에 깔린 광고판들이 산업화의 방향을 말해주는 듯하다. 키갈리 도심은 물론 기호궤, 무심바 마을로 가는 국도 변에 줄지어 선 식당과 상가 건물들에는 예외 없이 르완다 이동통신업체들의 로고가 외벽을 뒤덮고 있다.

르완다 통신시장을 호령하는 MTN을 비롯해 Tigo, Airtel 같은 업체가 경쟁적으로 도로변 홍보전에 돌입한 까닭이다. 르완다의 농촌은 같은 마을이라 해도 농가들이 한데 몰려 있지 않고 여기저기 산재해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부에서도 마을 단위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주민의 이주를 추진해 마을의 재구성을 고민하고 있을 정도다.

지금처럼 주민이 흩어져서 거주하는 농촌 구조에서는 전기·상수도·도로·공공시설 등 산업인프라를 까는 데에 엄청난 비용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설치한다 해도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직 전기 보급이 안 된 농촌에 유선전화가 보급될 리 만무하다. 대신 농촌의 많은 가구가 무선전화에 의존한다.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농촌의 사정이 이런 까닭에 중앙정부가 무선 통신망 구축에 열을 올리는지도 모른다.

이런 나라에서는 농촌 살리기 정책이 매번 후순위로 밀리게 마련이다. 그럴수록 농촌에는 자구책이 절실하며 때론 혁신을 필요로 한다. 기호궤 마을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무심바 마을은 2011년 시범마을로 선정됐다. 340여 가구에 1300여 명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지만 이 일대 농촌에 ‘하면 된다’는 새 바람을 일으키는 ‘태풍의 눈’으로 주목받는다.

쌀 한 톨 안 나는 무심바에 벼농사를 정착시킨 데 이어 이웃한 4개 마을까지도 벼농사 대열에 합류케 하는 등 소득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농협 조합원도 사업 초기에는 49명에 그쳤으나 현재 5개 마을 460명으로 증가했다. 새마을운동이 보급된 지 올해로 3년차임을 감안하면 단기간에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린 셈이다.


1 무심바 마을 주민들이 곡식 창고에 쌓아둔 벼를 트럭에 옮겨 싣고 있다. 이 곡식 창고도 새마을봉사단의 지원으로 건립됐다. 2 기호궤 마을의 부녀자들은 새마을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재봉기술도 배웠다. 새마을운동의 시작으로 집에만 있던 마을여성들의 대외 활동이 부쩍 늘었다. 3 새마을봉사단이 벌이는 가축은행사업은 주민들에게 또 다른 소득원을 만들어줬다. 마을 창고에서 주민들이 가축에게 줄 사료를 퍼 담고 있다.



무심바의 기적, ‘르완다 타임’을 바꾸다

기자가 찾아간 무심바 마을은 때마침 벼농사 시범농장에서 수확한 벼를 도정하고자 방앗간으로 실어 나르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올 상반기에는 모두 70t의 쌀이 생산됐다. 르완다 화폐로 1500만 프랑의 소득을 올린 것이다. 이번 농사에는 대략 300가구가 참여했다고 새마을봉사단에서 벼농사를 담당하는 정종렬 씨가 설명했다. “한 가구당 5만 프랑씩 분배할 계획”이라며 “하반기 벼농사까지 하면 올해 농업협동조합회원이 가져가는 수익은 10만 프랑에 이를 전망”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곳의 벼농사는 말 그대로 땀과 눈물이 빚어낸 기적에 가깝다. 새마을봉사단과 마을 주민들은 마을 북쪽 저지대 정부 소유 습지 21.2ha를 50년간 무상으로 임대받아 논을 조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트랙터 등 한국 농촌에서 흔히 보는 농기계를 이용하는 대신 100% 인력에 의존했다. 기계를 구입할 자금도 부족했지만 무엇보다 남아도는 인력을 활용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노동력에 의존하게 됐다고 정종렬 씨가 설명했다.

새마을운동이 도입되면서 주민들의 일상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었다. 집보다는 일터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예전 같으면 오후에 쏟아지는 뙤약볕을 피해 웬만한 일은 오전에 다 끝내고, 오후에는 술을 마시거나 무료하게 빈둥거리는 사람이 많았다. 노동량이 적은 데다 생산성마저 떨어져 우리로 따지면 춘궁기라 할 6, 7월이면 식량난에 허덕이곤 했다.

사업 초기에는 관성대로 오전에만 일하고 오후엔 일손을 놓는 등 농지개간 같은 공동작업에 빠지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주민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약속 시간에 늦는 건 예사여서 ‘르완다 타임’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하지만 벼가 쑥쑥 자라면서 사업에 미온적이던 주민들의 자세가 점차 협조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무심바 마을의 타르시즈 코리무(CORIMU) 농협협동조합장은 이렇게 말했다. “시범마을로 선정되기 전에는 주민들이 시간 개념이 약했죠. 하지만 벼농사, 파인애플 농사 등 소득증대 사업이 추진되면서 주민들도 효율적인 시간 활용에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노동시간이 증가한 데 대한 불만도 현저히 줄었어요.”

이 마을 농가소득원으로 파인애플을 빠뜨릴 수 없다. 아프리카는 파인애플 세계 최대 수입 지역인 유럽과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르완다는 토질이 비옥해 파인애플의 당도가 높은 이점을 안고 있다. 새마을봉사단은 1인당 0.2ha씩 모두 50명에게 10ha의 파인애플 농장을 조성하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올 3월~5월 수확기에는 가구당 평균 1만148프랑의 수익을 올렸다. 이제는 생산뿐만 아니라 판로 개척에도 눈을 돌린다. 파인애플 농사를 책임진 새마을봉사단 정요한 씨는 “식당과 커피숍 등 대량 소비처를 직접 찾아가 직거래를 성사시키는 등 주민들이 판로 다각화에도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고 말했다.

무심바 마을이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는 데는 숙원사업이었던 유아교육 시설이 들어서고 모범적으로 운용되는 덕도 봤다. 새마을회관 옆에 유치원이 들어서기 전까지 이 마을 어린이들은 옆 마을의 유치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마저도 혜택을 받는 어린이가 많지 않았다. 지금은 마을 한가운데에 보란 듯이 세워진 유치원에 오전, 오후로 나눠 모두 90명의 아이가 다니고 있다. 부모는 안심하고 일터로 향하고 아이들은 안전하게 보호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자립능력 커진 주민들, 스스로 사업 계획 세워

사업이 하나둘씩 결실을 맺게 되자 새마을봉사단을 대하는 주민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농지 개간이니, 수로 개설이니 해서 일만 시키고 일당을 주지 않자 새마을봉사단이 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한다는 볼멘소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주민 소득이 증가하고 마을 환경이 개선되면서, 또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새마을운동과 봉사단에 대한 믿음도 점점 커져갔다. 이곳에서 봉사단원으로 일하는 이주은 씨는 “새마을운동은 척박한 르완다 농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면서 “지금은 주민 스스로가 주인의식을 갖고 사업 계획을 궁리하고 제안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구릉이 많아 예로부터 ‘천 개의 언덕을 가진 나라’로 불린 르완다. 자연경관은 빼어나지만 정작 농사에 쓰일 땅이 부족했다. 따라서 농사도 밭농사 위주이며 너른 토지를 필요로 하는 벼농사는 남의 나라 얘기처럼 흘려 들었다. 새마을운동은 지난 4년여 기간 동안 르완다 농촌마을에 벼농사와 함께 ‘하면 된다’는 신념을 선물했다. 마치 1970년대 한국 농촌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201408호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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