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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초점 - 새누리당 새 간판 김무성 대표의 行步 

“당청은 수평관계… 더 이상 일방통행 없다”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박근혜 정부 실패하면 김 대표도 대통령과 차별화 불가피…내년 하반기 경제·정치 악화되면 차기 대선 주자군 전면 등장 가능성도

▎7월 14일 서울 송파구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 및 최고위원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에서 승리한 김무성 대표가 당기를 힘차게 흔들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김무성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의 눈밖에 났다. 김무성이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먹을 것 같으니까 서청원 후보를 공천한 것이다.” 지난해 10월 경기도 화성갑 보궐선거에 친박계 중진 서청원 후보가 공천권을 따내자 새누리당 지도부의 A의원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서 후보의 진정한 용도가 ‘보선’에 있다기 보다는 ‘특정인 견제’에 있음을 확신하는 듯했다. 그게 대통령의 의중이라는 것이다. 김무성 의원이 100명이 넘는 현역 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공부모임을 여는 등 세 규합에 나설 즈음이다.

A의원은 “박 대통령이 집권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의원들 줄세우기나 하고 말이야”라며 김 의원을 힐난하면서 “내년 7월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잡으면 2년 뒤 총선 공천권을 행사해 대권까지 가겠다는 속셈”이라고 꼬집었다. A의원은 서 후보의 공천에 대해서도 “김 의원을 탐탁지 않게 보는 박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각본”이라고도 단언했다.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의원은 전당대회 기간 내내 첨예한 신경전을 펼쳤다. 7월 6일 대전무역전시관에서 열린 합동연설회에서 김영우 후보(왼쪽)의 제안으로 서청원(가운데)·김무성 후보가 포옹하고 있다.
최고위원을 지낸 다선의 새누리당 B의원도 비슷한 시기에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이 의원은 “전당대회에서 누구를 대표로 가져갈 것인가를 청와대가 고민한다”고 귀띔했다. “김무성이 돼선 안 된다는 생각에 박 대통령 측근들의 고민이 많을거다. 김무성이 당대표가 된다고 생각해보라. 박 대통령이 많이 불편해진다.”

‘무대’의 고뇌와 갈등… 승부수

7월 14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김무성 의원이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됐다. A의원의 말대로 각본이 있었다면 무대 위의 연극은 각본과 따로 논 셈이다. 김 대표는 서청원 후보의 맹렬한 추격을 뿌리치고 여유있는 표차로 대표직을 차지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에게서 정치를 배운 그는 선이 굵고 화통한 스타일이다. “한국 정치에서 권력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라고 믿는 그는 대표 자리도 친박계의 견제를 물리치고 자기 힘으로 거머쥐었다. 청와대가 김 대표의 당권, 대권 행보에 제동을 걸리라는 A·B의원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김무성 대표 체제의 출범으로 ‘주류(친박·親朴)-비주류(비박·非朴)’라는 새누리당 내의 고전적인 역학 구도도 허물어졌다. 비박계 등 비주류의 구심점이던 김 대표가 당권을 장악한 마당에 친박계를 더 이상 주류라고 부를 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선출직 최고위원 5명 중 친박계는 서청원 의원이 유일하다.

7·14 전당대회는 박 대통령을 따르는 친박계의 몰락을 확인하는 계기이자 여권 내 박 대통령의 입지를 가늠해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전당대회장을 찾아 축사를 했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은 일절 하지 않았지만 서청원 후보 힘 실어주기 행보라는 해석을 낳았다. 실제로 박 대통령 축사 일정이 정해진 뒤로 친박계는 대대적인 박심(朴心) 마케팅을 펼쳤다. 서 후보측은 “전당대회에 박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은 서 후보를 지지한다는 시그널”이라며 당내 주류의 결속을 유도했다.

김 대표는 여론조사와 현장투표에서 모두 1위를 기록했다. 2위인 서 후보를 8.1%포인트 차로 물리쳤다. 당성이 투철한 대의원들도 김 대표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대의원들은 친박계가 경선 불복 내지는 몽니를 부릴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여파로 지지율이 하락한 박 대통령의 여권 장악력,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번 전당대회는 ‘새누리당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화두가 생성된 공론의 장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지금까지 정국은 김 대표의 구상대로 풀려왔다. 그렇다고 김 대표가 당권을 거저 먹은 건 아니다. 적지 않은 고뇌와 갈등 속에서 던진 승부수가 적중한 것이다. 김 대표 측도 도중에 회군할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청와대의 완강한 ‘비토’ 기류를 알기에 진퇴를 고민했다. 친박의 주자로 누가 나설 것인지, 친박계의 결전의지는 어느 정도인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나날이었다. 올봄 청와대에서는 ‘김무성은 절대 안 된다’는 메시지가 여러 번 흘러나왔다.

당시 김 대표의 측근 인사는 “일단은 전당대회에 나간다”고 전제하면서도 단서를 달았다. “만약 당이 치명적으로 분열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불출마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친박계가 똘똘 뭉쳐 죽기살기로 특정인을 옹립하고, 김 대표가 총력을 경주하면서 양측이 섬멸전에 몰입하는 때다. 김 대표 경선 캠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정치인도 시종일관 “김 대표가 청와대와 맞서면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친박의 주자를 놓고서도 약간의 혼선을 빚었다. 김 대표는 한 달 여 전 사석에서 전당대회 대표 경선에 나설 친박 주자로 최경환 의원이 낙점될 가능성을 언급했다고 한다. 청와대가 고령에다 개인적으로 흠집을 가진 서 의원 대신 최 의원을 자신의 대항마로 검토하고 있다는 것. “내가 대표가 되면 여당 속 야당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청와대와 대립각을 세울 것이라고 모함을 하고, 필사적으로 비토하는 청와대 참모가 있다”며 얼굴을 붉혔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7월초 새누리당 전당대회 후보자인 김무성·서청원·홍문종 의원의 사무실이 있는 서울 여의도 대하빌딩 외벽에 대형 현수막이 걸려 선거분위기를 돋웠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이후 총리 인선도 난항을 겪는 등 정부·여당이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박 대통령의 리더십에 금이 가면서 청와대의 상황 관리능력이 현저히 약화됐고, 친박계의 내부 전열도 이완되기 시작했다. 김 대표가 정해진 수순대로 세를 몰아 낙승을 거둘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박 대통령, “야당은 비난해도 여당은 그래선 안돼”

권력의 생리를 잘 아는 이들 중에는 김 대표 체제 출범으로 이미 징후를 보이던 박 대통령의 레임덕이 기정사실화됐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꼭 멱살을 잡고 싸워서 그렇다는 게 아니다. 청와대가 과거처럼 의회권력의 일사불란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권력누수를 가져온다고 설명한다.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여권 인사는 “박 대통령은 지난 1년 4개월 동안 알게 모르게 국정운영을 뒷받침해주던 새누리당의 지원 사격을 더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내다봤다. 김 대표가 주변의 만류와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당권을 장악한 이상 “청와대가 하라는 대로 법안처리나 해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7월 15일 새누리당 김 대표 등 신임 지도부를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정국 관련 발언을 했다. 박 대통령은 “내가 경제 살리기와 적폐 해소에 나서는 건 사심이나 개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나라와 역사를 위한 것”이라면서 “그런데도 야당은 비난부터 하는데 여당은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며 협조를 당부했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김 대표도 나름대로 고민에 빠져 있을 듯하다. 막상 원하는 당권을 손에 넣었지만 그 시점이 너무 이른 감이 있다. 김 대표는 박 대통령 임기 개시 1년 4개월 만에 당대표에 선출됐다. 비록 리더십에 상처를 입었다고는 하나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의 권능은 막강하다. 일에 대한 열정과 의욕도 넘칠 때다. 이 시기 역대 정부의 집권당 대표는 가급적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인사 중에서 선출되곤 했다.

권위주의정부 시절과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는 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하는 까닭에 당대표는 총재의 의중에 좌우됐다. 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도 집권 5년 대부분을 대통령 직계 내지는 범 주류에서 당대표를 배출했다. 예외적으로 이명박 정부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비주류인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전권을 넘겼지만 이는 정권 말기의 상황이었다. 임기 반환점도 아직 멀기만 한 박 대통령은 벌써 권력의 일정부분을 비주류 출신의 김 대표와 나눠야 할 처지인지도 모른다. 집권 초에 비주류의 집권여당 장악은 한국 정치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박 대통령도 김 대표도 아직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에 나란히 들어선 셈이다. 김 대표는 전당대회 선거운동 과정에서 ‘수직적 당청(黨靑) 관계’를 ‘수평적 당청 관계’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예전 같으면 청와대는 정책이나 법안 리스트를 보내 원내대표나 정책위의장에게 관철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김 대표 체제에서는 ‘지시’가 아니라 ‘협조’ 내지 ‘공조’ 요청의 형태가 돼야 한다는 말이다.

김 대표는 “여당이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하는 정당이 돼야 한다”면서 과감한 진언도 마다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전당대회 기자회견에서 “누누이 말하지만 당은 대통령에게 밝은 눈과 귀가 돼서 국민의 여론을 구석구석 모두 대통령에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지금까지 그 점이 부족했는데 그런 방향으로 충실한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당청관계 설정 과정에서 마찰음이 발생할 소지도 없지 않다. 박 대통령과 김 대표가 맺은 지난 10년의 인연에 애증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정치를 야당 스타일로 배웠다. 1951년 부산에서 전남방직 설립자이자 5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용주 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1960년 민주당 원내총무를 지냈고, 김 대표는 1984년 YS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할 당시 합류해 통일민주당 창당 자금을 대는 등의 역할을 하면서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집권에 성공한 YS의 청와대 사정비서관과 내무부 차관을 거쳐 15대 총선에서 부산 남을 선거구에서 처음 금배지를 달았다.


▎2012년 12월 20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에서 열린 중앙선대위 해단식에서 인사말을 하는 김무성 당시 총괄선대본부장(맨 왼쪽).



“여기서 파문된 사람 얘기를 하면 곤란”

박근혜 대통령과는 2005년 당대표와 사무총장으로 인연을 맺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조직총괄본부장을 맡아 캠프의 경선을 진두지휘했다. 2008년 총선에서 친박계 좌장격인 그는 공천에서 탈락, 친박무소속연대를 이끌며 부산에서 당선됐다. “살아서 돌아오라”던 박 대통령의 요청에 화답했지만 그 뒤로 두 사람은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세종시 신안(新案)과 자신에게 온 당 원내대표 제안을 두고 사이가 틀어진 것이다. 김 대표는 2010년 박 대통령이 반대한 세종시 신안 국회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졌고, 그해 5월에는 한나라당 원내대표 경선에 참여, 친이계 지원을 업고 당선됐다.

이후 박 대통령은 “친박계에는 좌장이 없다”는 말로 사실상 김 대표를 파문(破門)했다는 게 친박계의 정설이다. 이때가 18대 국회다. 당시 친박계 한 핵심 의원은 계파 내부 풍경을 다음과 같이 전하기도 했다. “친박계는 다들 불행한 집단이다. 누구 하나 바른 소리를 안 한다. 친박으로 넘어오려는 비박(非朴)들에게 자리를 내주기는커녕 ‘네가 언제 친박 했느냐’는 식으로 내치기에 급급하다.

어떤 영남권 의원은 세종시 신안에 찬성표를 던졌다는 이유만으로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빗장을 걸더라. 한번은 물정을 모르는 국회의원이 김무성 의원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을 입에 올렸다. 옆에 있던 모 중진의원이 화들짝 놀라며 ‘여기서 파문된 사람 얘기를 하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무슨 종교집단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뒤로 김 대표는 박 대통령이 주도한 2012년 4월 총선 공천에서 탈락했으나 백의종군함으로써 박 대통령에게 힘을 보탰고 12월 대선을 앞두고는 거의 망가지다시피 했던 중앙선대위의 총괄본부장으로 복귀해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2013년 4월 부산 영도 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원내로 복귀했다.

원내에 복귀한 후에도 김 대표는 청와대를 향해 할 말을 했다. 현오석 경제팀 교체를 요구했고, 당청 관계를 수직으로 만든 장본인으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목하기도 했다. 또 지난 5월에는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영도 지방선거 유세에서 “총리 제안을 거절했다”고 공개했다.

두 사람은 ‘2인3각’으로 10년을 함께 걸어오면서 비틀거릴지언정 넘어지지는 않았다. “서로 필요에 따라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의지하는 사이는 아니었다”는 게 친박계 인사들의 관전평이다. 2007년 한나라당 박근혜 경선캠프에서 김 대표와 함께 일한 한 중진의원은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박 대통령이 처음에 김 대표에게 마음을 열었다가 나중에 닫은 게 아니다. 처음부터 마음을 열지 않았다.”

김 대표는 박 대통령이 탄생하기까지 몇 번의 위기를 자신이 극복해줬다고 생각한다. 김 대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여줬다”면서 “내가 박 대통령 가는 길에 잘못한 일이 언제 있었느냐”며 답답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채 같은 길을 걸어온 것이다. 두 사람은 정치하는 스타일도 달랐고, 2인자로서의 처신도 상반된다.


▎2012년 19대 총선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한 김무성 의원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백의종군 의사를 밝힌 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2인자론은 ‘은인자중’에 방점이 찍힌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미래권력이 전면에 나서면 현재권력인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항상 2선을 고집했다. 사실상의 2인자였지만 국정 현안이나 정국 이슈에 발언을 삼갔다. 여당의 집요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당직을 거부하다 19대 총선 위기론이 증폭되던 2011년 12월에야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다. 2004년 한나라당 대표에 선출된 이래 7년 만의 ‘당직 외출’이었다.

출처 불명의 친박계 ‘5적(賊)론’

김 대표는 앞서 보았듯이 너무 이른 시기에 청와대의 의중을 거스르면서까지 당권을 장악했다. 그것도 집권 초에 보란 듯이 공개모임인 ‘근현대 역사교실’을 열어 100명이 넘는 의원들을 끌어 모았다. 나중에 약간의 완급조절은 있었지만 ‘무대(김 대표의 별칭. ‘김무성 대장’의 준말)는 무대의 길을 간다’는 시그널을 지속적으로 발산했다. 김 대표는 당선 후 언론 인터뷰에서 평이하지만 중요한 말을 했다.

“우리가 정치를 하는 것은 국민을 보고 하는 것이므로 할 말은 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이런 게 화제가 되는 현실 자체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박 대통령을 따르는 친박계 의원들의 침묵과 순종적 자세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발언이다. 김 대표의 한 참모도 ‘정치인 김무성’의 매력은 “어려울 때도 뒤로 빼지 않고 솔직하게 대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 임기 첫 해에도 할 얘기를 한 사람으로 각인됐듯이 앞으로 당대표 2년 동안에도 비굴하게 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친박계 핵심들은 그런 그가 대권을 꿈꾸기에 필연적으로 박 대통령과 충돌하리라고 본다. 전당대회 기간 중 서청원 후보가 집요하게 이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서 의원은 “당대표 자리를 대권으로 가는 디딤돌로 이용하려는 후보가 있다면 당을 분열시키고 청와대와의 갈등을 불러일으킨다”고 김 대표를 공격했다. 그는 특히 “대선 후보 경선의 공정성이 훼손되면서 정권 재창출이 어려워진다”고 강조하면서 “김무성 후보가 순수하게 박 대통령만 돕겠다며 2017년 대선 후보를 포기한다면 나도 중대 결정을 하겠다”고 압박했다.

정리하자면 김 대표가 제사(당대표)보다 젯밥(대통령)에 관심이 더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김 대표는 “서 의원은 당대표가 돼서 당을 어떻게 이끌겠다는 생각으로 출마한 게 아니라, 오직 나를 당 대표로 만들지 않기 위해 출마한 것을 스스로 실토한 것”이라며 반박했다. 나아가서 의원 주장을 구태정치의 전형으로 몰아붙였다.

같은 당 사람끼리 해서는 안 될 극단적인 혐오의 감정도 드러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전당대회장 안팎을 배회한 ‘5적(賊)론’이다. 전당대회 과정에서 각 후보 진영은 물 밑에서 첨예한 심리전을 펼쳤다. 누가 유포했는지 출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여권 내에서는 이런 얘기가 떠돌았다. “김무성 후보가 대표가 되면 ‘5적’은 반드시 손볼 것이다. 친박계 핵심이라 할 K·H·K·J·Y의원이 그들이다. 여기에 다른 Y의원을 더하면 6적이 된다.” 마치 김 대표 진영에서 살생부를 작성했다는 투의 소문이다.

김 대표 쪽은 생사람 잡는다며 정색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친박계 살생부가 나돈다는 소문은 결국 친박의 결집을 불러와 비박 주자인 김무성 후보 득표력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박 진영에서 의도적으로 흘렸을 거라는 역공이 가해지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를 악성 루머의 진원지로 지목하는 등 감정의 골이 깊게 패였다.


▎한나라당 원내대표 시절이던 2010년 5월 서울 상도동 김영삼 전 대통령 자택을 찾은 김무성 대표가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YS “니밖에 없다. 대선 출마해”

공교롭게도 김 대표는 경선과정에서 이미 친박계의 당직 배제 방침을 밝혔다. “대표가 되면 그동안 소외된 사람들을 전면에 등장시킬 것”이라며 “친박 핵심들은 이제 좀 쉬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소수 친박 핵심이 편가르기를 하면서 당을 독단적으로 운영해 당이 위기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김 대표는 과연 차기 대선에 도전하려는 걸까? 그는 취임 후 이런 질문에 대해 “우선 대통령 임기 1년 4개월이 됐는데 대권 운운하는 거 자체가 시기상 맞지 않다”면서 “나는 어떻게 하면 당대표를 성공적으로 잘 끝낼까 생각뿐”이라고 말을 잘랐다. 하지만 지난해 9월 <월간중앙>과 만나 자신의 대선 행보와 관련해 흥미로운 얘기를 남겼다. YS가 했다는 말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사이가 어떤지요? “각하가 제일 가까이 하고 있는 게 나요. 지금은 병원에 계시니까 내가 자주 못 가 뵙지만. 각하는 나보고 대선에 출마하라고 여러 번 그랬어요.“ 대선 출마를요? “오랜 기간 종용을 하셨어요.” 언제부터 그런 말씀을 하셨나요? “오래 됐지. 이명박 정부 들어서고 난 뒤니까.”

박근혜 대통령이 들었다면 별로 좋아하지 않았겠는데요? “대통령(YS)께서 한때 박 대통령은 아니라고 했잖아요. 마지막 순간까지. 나보고 하라고 하시는데 저는 ‘각하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런데도 (YS는) ‘아니다 니밖에 사람이 없다’는 얘기를 계속 하셨어요. 그때는 내가 안 한 겁니다. 나는 박근혜 대표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YS가 권유했을 당시에는 ‘아니다’라고 얘기했는지 몰라도 지금 여권에는 변변한 차기 주자가 없습니다. “내게 그런 자격이 있는가를 깊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대선 주자로서의 자격에 대한 김 대표의 고민은 계속되는 걸까? 아니면 이제 그 결론을 마음속에 담은 걸까? 정치적 스승인 YS의 권유라면 그의 마음도 흔들릴 법하다. 더구나 새누리당 등 여권은 과거 박근혜 의원과 같은 발군의 에이스가 없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정몽준 전 의원·남경필 경기지사·오세훈 전 서울시장·김태호 새누리당 최고위원·원희룡 제주지사 등 몇몇 정치인이 거명되고는 있으나 다 고만고만한 지지율에 머물 뿐 치고 나가는 이가 없다. 김 대표는 전당대회 경선에서 승리함으로써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여권 대선 주자의 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게다가 그는 2016년 총선 공천권을 행사하는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그의 임기는 2년이다. 2016년 4월 치러지는 20대 총선 공천을 주도할 수 있다. 김 대표도 “분명히 총선 공천은 내가 주도한다”고 못박고 나왔다. 그는 평소 공천 개혁을 입에 달고 다녔으며 당대표가 돼야 하는 명분으로 내세웠다.

심지어 정치권 만악의 근원이 공천권이라고도 했다. 그는 “공천권은 미운 사람 잘라내는 도구로 악용됐다”면서 “공천권만 확실하게 당원과 주민에게 돌려주면 정치에 여한이 없다”고 상향식 공천 원칙에 충실할 것임을 누누이 밝혔다. 그렇다고 김 대표의 미래가 반드시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곳곳에 복병이 있어 본인이 원치 않는 선택을 강요당할 수도 있다. 실제로 역대 당대표 중에는 총선을 앞두고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중도 하차한 경우가 더러 있다. 2011년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그랬다. 그해 7월 전당대회에서 치열한 접전 끝에 안상후 후보를 누르고 당권을 거머 쥔 홍 대표는 불과 7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을 강요당했다.

“박 대통령이 이미 많이 변했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강행 처리, 선관위 디도스 공격 파문 등 잇단 악재로 당의 지지도가 곤두박질치면서다. 이듬해 4월 19대 총선 참패 위기감이 당을 엄습하면서 지도부 개편 요구가 빗발쳤다. 결국 유승민·남경필·원희룡 최고위원 사퇴로 지도부가 와해되면서 끝까지 버티려던 홍 대표도 2011년 12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19대 총선 공천은 바통을 이어받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주도했다.

2004년 17대 총선도 별반 다르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에다 대선자금 비리 의혹까지 겹쳐 의석 50석 확보도 어렵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한나라당을 무겁게 짓눌렀다. 탄핵을 주도한 최병렬 대표 등 당 지도부가 전격 퇴진하면서 박근혜 대표 체제로 총선을 치렀다. 이때도 공천은 박 대표가 주도했다.

이처럼 총선 전망이 극도로 어두울 땐 당대표와 지도부가 수난을 겪곤 했다. 현 지도부도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내년 하반기에 수출·환율·내수·일자리 등 한국 경제 여건이 지금보다 더 악화되고 박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바닥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흉흉한 민심이 새누리당을 겨냥할수도 있다. 예전에 그랬듯이 새누리당 지도부가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새누리당 지도부 일각의 현실인식이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위해 온몸을 바치겠다”던 김 대표의 취임 일성은 빈말이 아니다. 그는 “‘풍우동주(風雨同舟: 비바람 속에서 한 배를 탄 운명)’라는 표현처럼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도 말했다. 박근혜 정부의 성공은 김무성 대표의 임기 완주와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정부·여당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당청 관계는 기존의 수직·순종 관계에서 수평·대등한 관계로 가야 한다는 게 김 대표의 지론이다. 국정운영에 적극 협력하면서도 민심과 동떨어진 정책이나 인사에 대해서는 제동을 거는 ‘투 트랙(Two track)’ 접근을 꾀할 것으로 예상된다.

<월간중앙>은 청와대 오찬 회동이 있던 7월 15일 밤늦게 김 대표와 전화 통화를 했다. 그는 “수평적 당청 관계를 구축하자면 청와대와 당이 소통을 자주 해야 한다”면서 “특히 주요 현안은 당과 사전에 상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당청 관계 재정립 의향이 있더냐는 물음에 “박 대통령이 이미 많이 변했다”고 전했다. “대통령이 여당도 만나고 야당도 만나지 않느냐? 그게 큰 변화다.”

이런 노력에도 내년 이맘때쯤 박근혜 정부가 절반의 실패작으로 판명이 난다면? 상황이 아주 복잡해진다. 새누리당 지도부가 임기를 다 못 채우고 하산해야 할 수도 있다. 그간 당과 거리를 둬 온 김문수·유승민·오세훈 등 잠룡들이 임시 전당대회나 비대위를 통해 새 지도부를 채울 수도 있다. 이들이 다음 대선의 주자군을 형성하게 된다는 말이다.

박 대통령과 가장 차별화되는 인물이 여권의 지도자로 선택받을 수도 있다. 결국 김 대표가 대선으로 가자면 적절한 시점에서 박 대통령과 차별화에 나서야 한다. 서청원 의원이 김 대표를 일러 “당대표 자리를 대권으로 가는 디딤돌로 이용하려는 후보”라고 공격한 것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일까?

201408호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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