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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書齋 | 노년은 제2의 인생, 황금 연령의 세대다 

 

장석주 전업작가
잉여인간 모습 뒤에 감춰진 노인들의 에너지 <퇴적공간> vs 활기찬 노년을 보내는 비결 <노인으로 산다는 것>



영원한 젊음의 신화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더 오래 젊음을 유지하고 싶은 것은 인류의 오래된 열망이다. 젊음이란 인생의 한 절정, 눈부신 가치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늙는다. 따라서 노화는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한 과정이다. 나이가 들면서 몸의 장기와 세포와 유전자에서 노화가 동시에 진행되는데 몸의 내장·근육·신경계·소화기관·생식기관들이 노후화되면서 그 기능이 쇠퇴하는 것이다. 이 쇠퇴로 세포들이 주고받는 화학적 신호에 교란이 일어나고 세포의 항산화 기능도 떨어진다.

그러면서 세포들 중에서 미친 세포들이 느는데, 그 미친 세포들이 암의 병소(病巢)로 바뀐다.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젊은 인류의 미래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생물학적으로 ‘노인’이 된다는 점이다. 나이가 들면 세포들이 늙는다. 근력이 떨어지고 쉽게 피로를 느끼며 기억력이 감퇴한다. 세포들이 늙으면서 몸의 여러 장기에 노화 현상이 나타나고 퇴행성 질환이 찾아드는 것이다. 젊은 인류가 노화를 겪으며 노인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생물학적 진실이지만 진짜 노인은 생물학적으로 늙은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인 잣대로 노인으로 분류된 집단을 가리킨다.

노인들은 한때의 상징적 자본을 잃고 잉여의 존재로 전락한다. 가족 내부에서,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유리 방황하다가 결국은 ‘퇴적 공간’으로 밀려난다. 문제는 젊은 노인들의 출현이다. 인류의 수명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지금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과거에는 볼 수 없던 젊은 노인들이 대거 나타난 것이다. 지난세기의 초에 견줘 세기의 말에 이르러서는 인류 평균수명이 거의 갑절로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는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수명은 대약진을 이룰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인간 수명이 늘면서 노화의 시기도 늘어났다. 이 말은 인류가 더 많은 시간을 노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노인들은 무기력하지 않다

‘노인’들은 누구이고, 노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오근재의 <퇴적공간>과 조엘 드 로스네, 장 루이 세르방 슈레베르, 프랑수아 드 클로제, 도미니크 시모네 등이 공저한 <노인으로 산다는 것>이 그 답이 된다. 노년은 자연 수명을 누리는 모든 사람의 미래지만 노인들은 점점 더 사회의 골칫덩어리, 잉여 존재, 의미가 소진된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오근재는 노인들이 모여드는 탑골공원과 종묘시민공원 일대를 탐사하고,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노인들의 현재적 삶을 차갑게 응시한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노화’란 단순히 생물학적인 의미로 유기체 기능의 퇴행과 감퇴만을 말하지 않는다. 건강한 신체와 지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 해도 노동 시장에서 퇴출되면 사회적인 쓸모를 인정받기 어렵고,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상품 가치를 잃어버린다”고 쓴다.

‘노인’은 단지 나이가 많아 늙은 사람들이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퇴출되어 ‘퇴적공간에 쌓여 있는 잉여인간들’을 가리킨다. ‘노화’는 생물학적인 신체 기능의 쇠락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노동시장에서 상품가치를 잃고 탈락하면서 물화(物化)된다는 뜻을 포함한다. 퇴적공간은 사회적 생산의 활력을 잃고 잉여인간으로 전락한 세대의 도피성 공간이다. 저자는 종묘와 탑골공원에 모이는 노인들의 군집에서 사회적 “변화의 내용보다 변화의 속도에 충격을 받아 시대의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대가 남기고 간 잉여인간의 집합’”(181쪽)을 본다.

하지만 선입견과는 달리 그 퇴적공간에 몰려든 ‘노인’들이 연출해낸 것은 무기력과 우울만은 아니다. 오근재는 탑골공원 뒷골목의 탐사를 마친 뒤 “한끼의 식사, 간단한 음료, 바둑과 장기, 이발…. 이런 서비스가 이루어지는 골목의 가게들은 지갑이 얇은 노인들이 주눅 들지 않고 하루를 즐길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듯 보였다. 그것은 한국의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감추고 싶어하는 서울의 속살”(84쪽)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노년의 삶이 잉여만이 아니라 활기찬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경이로움일 수도 있다는 새로운 발견이다.

규칙적 운동과 두뇌활동 필요

<노인으로 산다는 것>의 저자들은 인간은 왜 늙는지, 그리고 건강하고 활기찬 노년의 삶을 일굴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모색하고 제시한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나이 드는 것과 사회적으로 늙어가는 것의 차이에 주목한다. 생물학적 나이와 사회적 나이가 일치할 때 비로소 진정한 ‘노인’이 되지만 현대사회에서 그 둘 사이의 불일치가 뚜렷하다.

분자생물학자와 인권운동가, 그리고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진 미디어 전문가들은 ‘장수’ 사회로 진입한 지금 파생하는 다양하면서도 구체적인 문제들을 탐색한다. 노인들은 인간 조건의 비극적 부조리인 죽음과 지근거리에 있는 존재다. 노인들은 소외되고 고독한 존재로 자칫하면 권태와 우울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늙음은 치욕도 죄악도 아니다.

늙음은 새로운 연령대로 들어서는 것을 뜻하며, 그로 인해 갖게 되는 새로운 기회다. 자, 노년의 앞에는 지금까지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인생이 펼쳐진다. 아직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고, 몸에는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며, 정신은 또렷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생에 대한 풍부한 경험에서 쌓은 경륜과 지혜가 있다. 그럴 때 노년은 인생의 내리막이 아니라 오르막이다. 노화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다.

같은 맥락에서 장수(長壽)는 ‘타인, 그리고 세상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고, 내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도록 추동하는 계기를 만든다.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는가? 나이가 들면서 삶의 질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을 막고 건강한 삶을 누리는 것은 “올바른 식생활, 지속적인 두뇌 활동, 올바른 호흡법, 매일 규칙적인 운동, 자신감 갖기”(115쪽)에 달려 있다.

노화는 노동력의 상실, 사회적 지위와 관계망에서의 물러남, 기력의 소진, 그리고 죽음의 전조(前兆)다. 오래 쓴 기계들이 부식되고 녹이 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애초에 몸과 정신의 쇠락과 함께 죽음을 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생명이란 “껍데기 같은 우리의 몸을 관통하는 흐름”이고, “인생이란 죽음에 대항하여 싸우게 해주는 현상들의 합”일 뿐이다(<노인으로 산다는 것>, 103쪽). 과거에 견줘 눈부시게 발전한 의료 혜택이 보편화되고 영양상태가 좋아지면서 죽음이 늦춰진 까닭에 노년의 삶이 길어졌다는 사실이다.

노년은 ‘독이 든 선물’일까? 늙음이 항상 기회와 가능성, 그리고 생명의 고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나무의 열매로 치자면 무르익은 열매들이고, “정신으로 이루는 혁명”(크리스티안 생제르, <우리 모두는 시간의 여행자이다>)이다. 노인들이란 현대의 극단적인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즉 인류의 취약한 부분이 아니라 승리한 영웅들의 집단이다. 장수는 그 영웅들에게 주어진 값진 전리품이다.

아울러 노년의 삶이란 인생의 대서사시를 완성하는 결구(結句)에 해당한다. 청년의 삶이 풋풋함으로 싱그러웠다면 노년의 삶은 심오함과 원숙함으로 빛난다. 죽음에 쉽게 투항하지 말고, 삶의 경이로움을 즐겨라! 무수한 경험을 쌓으며 얻은 ‘무르익은 지혜’를 발휘하고, 인생의 마지막 기착지에서 만난 ‘황혼의 평화’를 만끽하라!

201407호 (201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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