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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급진전! 아베 북일수교 쇼크 - 북한-일본 수교 막후접촉 비하인드 풀스토리 

오바마, 4월 방일 때 북일 국교정상화 양해했다 

콘도 다이스케 일본 <週刊現代> 총괄 부편집장
10년 전 고이즈미 총리 당시의 북일 접촉 양상과는 현격하게 달라…하반기 미국의 대(對) 북한 관계개선 움직임과 맞물려 큰 진전 이룰 듯

▎5월 29일 일본 총리관저에서 북·일 간 합의사항을 발표하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



일본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일중·일한 관계 개선에 직결되는 포인트로 생각한다. 나아가 북한과의 수교는 중국을 견제하는 데에도 특효약으로 본다. 올해는 북한의 핵실험이 없을 것이란 가정 하에 북일 수교의 분위기는 농익었다는 판단인데…. 동북아 격변의 시대는 과연 어떻게 오는가?

2012년 12월 26일,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두 번째로 총리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는 은밀하게 ‘3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는 ‘3개의 화살’로 구성된 이른바 ‘아베노믹스(Abenomics)’를 성공으로 이끌어 일본경제를 부활시키는 것, 둘째는 1947년에 시행된 이래 단 한 글자도 바꾸지 못한 ‘일본국헌법’을 개정해 일본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드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일본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외교적 성과를 올리는 것이었다.

첫째 목표인 아베노믹스는 지난해 봄,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금융완화라는 ‘첫 번째 화살’을 화려하게 발사하여 엔화 하락과 주가 상승을 이끌었다. ‘두 번째 화살’인 공공투자는 지난해 9월에 유치에 성공한 2020년 도쿄(東京)올림픽을 계기로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세 번째 화살’이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 6월에 일본경제의 이정표라 할 수 있는 ‘골태 방침(骨太の方針: 일본 정부의 경제재정운영의 기본방침)’을 내놓았지만, 그림의 떡으로 끝날 수 있다는 걱정 어린 지적이 많다.

둘째 목표인 헌법개정을 위해 지난 한 해 동안 아베 총리는 지속적으로 사회분위기를 고무시켜왔지만 일본 국민들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때문에 헌법 개정을 일단 단념하고 헌법해석의 변경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우회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15년째 함께 연립 여당을 구성하고 있는 ‘평화의 당’ 공명당의 반대가 강하기 때문에 성사여부가 불투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베 총리는 지금 그의 셋째 목표인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외교적 성과’에 전력을 쏟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그의 정치적 스승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전 총리도 할 수 없었던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다. 아베 외교의 기본이념은 ‘중국에의 대항’이다. 일본은 1894년의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100년 이상의 오랜 기간에 걸쳐 ‘아시아 넘버1’의 국가로 군림했다. 그러던 것이 지금에는 경제력, 정치력 및 군사력에 있어서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에 뒤쳐져버렸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중국에 뒤쳐졌다’라는 현실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외조부인 키시 신스케(岸信介) 전 총리의 시대에도,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 전 외무장관의 시대에도, 일본은 쭉 아시아에서 최고 강대국이었고, 따라서 앞으로도 계속 최고여야 한다는 ‘몽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계 부딪힌 ASEAN 외교와 북방영토 반환

2013년 한 해 동안 아베 총리는 ‘중국에의 대항’을 위한 주된 외교 타깃을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으로 정했다. 아세안은 2015년에 인구 6억 명의 통일 시장이 된다. 따라서 아세안 10개국을 포섭해 일본과 아세안이 ‘중국 포위망’을 짜려고 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2013년 1월에(두 번째 총리 취임 후) 최초 외교순방지로 아세안 4개국을 방문, 마지막 방문지인 자카르타에서 ‘아베 독트린’을 발표했다. ‘아베 독트린’의 전체 5항목 가운데 앞의 3항목은 ‘중국에의 대항’이 목적이다. 다시 말해 ①인류 보편적 가치인 사상·표현·언론의 자유에 관한 완전한 실현 ②해양에 있어서의 법과 룰의 지배 실현 ③자유롭고 개방적으로 연결된 경제관계의 추구다.

아베 총리는 이러한 ‘아베 독트린’의 기치 아래 2013년에 아세안 10개국을 모두 순방했다. 그러나 아세안 국가들과의 외교 역시 아베 총리의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아베 총리가 방문하면 ‘일본 환영!’이라며 들끓어 오르지만, 그 후에 중국의 고위 관료가 방문하면 이번에는 ‘중국 환영!’이라고 달아 오르는 것이다. 즉 아베 총리가 아세안 외교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총리는 되지 못할 것이다.

이를 깨달은 아베 총리는 2014년에 들어서 대 러시아 외교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현재의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역사상 최고의 중·러 관계’라고 자부하고 있는 만큼, 중·러 관계에 쐐기를 박게 되면 이것은 강력한 ‘중국에의 대항책’이 된다.

또한 일본과 러시아는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아직 평화조약조차 맺지 못했다. 일본의 패전으로 러시아에 탈취 당한 북방영토의 4개 섬에 대해서 러시아는 ‘전쟁승리에 의한 영토 취득’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며 아직도 실효적 지배를 유지하고 있다. 그 때문에 북방영토의 반환이 이뤄지면 이는 1969년의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이래 최대 외교성과가 된다.

일본에 다행인 것은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2개섬 반환론자’라는 점이다. 즉 4개의 섬 가운데 홋카이도(北海道)와 가까운 하보마이 군도(齒舞群島)와 시코탄 섬(色丹島)은 일본에 반환해도 좋다고 수면 아래에서 추파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단, 2개의 섬을 합쳐도 그 면적은 4개 섬 전체의 7%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푸틴 대통령은 “그 이상은 절대로 반환하지 않겠다”고 명백히 못박고 있다.


▎2004년 5월 22일 북한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오른쪽)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고이즈미 정권의 대북외교에서 배제된 아베

이에 대해 아베 총리는 전방위로 공세를 폈다. “먼저 2개 섬을 반환하고, 남은 에토로후섬(択捉島)과 구나시리섬(國後島)은 일본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관리한다”, “나머지 두 개의 섬도 일본에 귀속되는 대신 러시아에 50년간 조차한다” 등의 이런 수 저런 수를 총동원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올해 2월의 소치올림픽 개막식에 참석, 개막식 다음날 푸틴 대통령과 점심을 함께했다. 푸틴 대통령과 최고급 보드카로 5잔이나 건배하고 기분이 좋아진 그는 측근에게 이렇게 중얼댔다. “푸틴과는 최근 1년 동안 5번째 회담이지만, 오바마보다 훨씬 이야기가 통하는 남자다. 내년 가을까지 북방 영토는 반드시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3월에 급작스럽게 우크라이나 위기가 발발하면서 아베 총리의 ‘몽상’은 다시금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이때부터 아베 총리는 오롯이 북한과의 국교정상화에 조준을 맞추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북한과의 국교정상화야 말로 아베 총리가 추구하는 것을 모두 채워준다. ‘중국에의 대항’이라고 하는 의미에서는, 1992년에 한국과 중국의 국교 정상화 때의 북한의 충격을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같은 정도의 충격을 중국에 줄 수 있다. 북한에 대해서 “중국에게 의존하는 것은 그만두고, 경제발전은 일본에 맡기라”고 추파를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역사에도 이름을 남길 수 있다. 일본 정치사의 흐름을 짚어보면 지금의 자민당은 다나카(田中) 파와 후쿠다(福田) 파 등 2대 파벌의 각축장이다. 1972년에 다나카 카쿠에이(田中角榮)가 총리 취임 후 2개 월만에 일중 국교정상화를 완수함으로써 일본 내에서는 방대한 중국 이권이 생겼다. 이후 2008년까지 합계 3조엔 이상의 ODA(정부개발원조)를 중국에 쏟아붓는 것으로 다나카파는 일본을 지배했다.

2000년 4월에 다나카파의 오부치 게이죠(小淵惠三) 총리가 총리 관저에서 쓰러진 것을 계기로 처음으로 후쿠다(福田) 파로 정권이 넘어왔다. 그것이 모리 요시로(森喜朗) 정권이다. 그러나 다나카파의 방해로 모리 총리는 불과 1년 만에 정권을 포기했다. 2001년 4월에 모리 총리의 뒤를 이어받은 후쿠다(福田) 파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는 다나카파와 같은 장기 정권지배를 위해서 다나카파의 중국 이권에 필적하는 거대 이권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며 그것이 바로 북한과의 국교정상화였다.

당시의 고이즈미 정권에는 아시아 외교를 관장하는 두 개의 라인이 있었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외무성 아시아 대양주 국장 라인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 부장관-사이키 아키타카(齊木昭隆) 외무성 아시아 대양주국 심의관 라인이다. 전자를 ‘친중파 그룹’, 후자를 ‘반중파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양자는 서로 말도 건네지 않는 험악한 사이였는데 고이즈미 총리는 대북 외교를 전자에게 맡겼다.

다나카 국장은 2001년 가을부터 2002년 여름에 걸쳐 30차례 정도 주말마다 중국의 선양(瀋陽)과 다롄(大連)으로 단신 출장길에 올라 북한의 류경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2011년 초에 처형됐다고 추측)과 ‘비밀접촉’을 가졌다. 나중에 필자가 다나카 씨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먼저 호텔 방에 들어가 텔레비전 볼륨을 크게 틀어놓는다. 그렇게 해서 중국의 도청을 방지한 후 되도록 필담으로 교섭했다고 한다.

고이즈미 대북행보에 대한 부시정권의 격노

교섭은 서로가 ‘자국의 최고지도자’로부터 신임을 얻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다나카 국장은 일요일에 귀국하면 반드시 월요일 총리관저를 방문, 고이즈미 총리와 후쿠다 관방장관에게 보고한다. 일본 정치계의 관습상 총리가 면회한 인물은 다음날 신문에서 공개되기 때문에 다나카 국장이 확실히 고이즈미 총리에게 직접 보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금요일 신문의 ‘총리동향’ 코너에 다나카 국장의 이름이 나오면 고이즈미 총리로부터 새로운 지시를 받고 있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북한의 경우는, 예를 들면 다나카 국장이 류경 부부장에게 “북한으로 건너간 일본인 처의 근황이 <노동신문>에 실렸으면 좋겠다”라고 의뢰한다. 노동신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허가한 것만이 실리는 조선 노동당기관지이므로, 기사가 며칠 후에 <노동신문>에 게재되면, 류경 부부장은 김 국방위원장에게 신임을 받고 있다는 증명이 된다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과 북한은 ‘국교정상화’라고 하는 큰 산을 향해 각각 북쪽과 남쪽의 양끝에서 오르기 시작했다. 일본은 납치 피해자의 귀국을 목표로, 북한은 36년간의 식민지지배의 보상을 목표로 해서. 그리하여 마침내 2002년 9월 17일에 고이즈미 총리가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진 후 북일 평양선언에 서명한 것이었다. 이때 필자도 수행기자로서 총리와 함께 평양으로 건너갔지만, 12년이 지난 지금 기억나는 것은 주먹밥이다.

오전의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고이즈미 총리에게 납치 문제를 사죄하고 “생존자 5명을 일본에 단기간 일시 귀국시켜도 좋다”라고 제안했다. 이 사죄야말로 그의 평생에 걸친 유일한 사죄였던 것이다. 그리고 점심을 위한 휴식시간이 되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평양에서는 절대로 북한 측으로부터 식사를 대접받지 않는다”라고 정했기 때문에 도쿄(東京)역 근처의 주먹밥 가게에서 대량의 주먹밥을 만들어 가지고 갔다. 일본 측 대기실에서 일본 대표단 인사들이 주먹밥을 입안 가득히 넣고 있는 가운데 방금 전까지 고이즈미 총리의 양 옆에 진을 치고 있던 아베 관방 부장관과 다나카 국장이 고성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아베 : “일본정부가 인정한 13명의 납치 피해자 가운데 현재 5명만 생존해 있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에 다나카 국장에게 건네받은 일조 평양선언의 문건에는 일본 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항인 ‘납치’라는 글자가 빠져 있다! 총리께서는 이 자리를 박차고 지금 당장 귀국하셔야 합니다.”

다나카 : “무슨 말인가? 외교교섭에서 한쪽 요구가 100% 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총리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북일 평양선언문에 사인하고, 북일 국교정상화를 이룩해야 합니다!”

두 사람의 격한 대립에 일본 측 인사들의 주먹밥을 잡은 손이 얼어버릴 지경이었다. 결국 고이즈미 총리는 “이미 내친 걸음이다”라며 일조 평양선언에 사인하기로 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귀국 후 일본에서 ‘두 가지 돌풍’이 일어났다. 하나는 ‘납치문제 돌풍’이다.

“일본인을 대거 납치해 가서는 5명으로 (문제를) 정리해버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매스컴은 연일 ‘악(惡)의 김정일’을 특집으로 다뤘다. 또 하나는 ‘미국의 야유’다. “우리가 ‘악의 축’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핵개발에 매진하는 북한과 국교 정상화를 시도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며 부시 정권의 화가 폭발한 것이다.

결국 ‘북일 평양선언’은 한낱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미국의 무서움을 깨달은 고이즈미 총리는 이후는 완전히 ‘미국의 애완견’으로 관철했다. 강경파인 아베는 ‘납치의 아베’라는 닉네임을 얻으면서 인기가 급상승했고, 2006년 결국 고이즈미 총리의 후계자가 됐다. 후쿠다 관방장관은 북한문제로 고이즈미 총리와 대립하면서 사임했으며, 다나카 국장은 ‘매국노’라는 딱지가 붙은 채 국회에 소환돼 눈물 어린 해명 후, 외무성을 사직했다.

이 소동 이후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본은 2007년에 한 번 정권에서 물러난 아베 신조가 2012년 12월 총리로 부활했으며, 북한에서는 같은 해 4월에 젊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전권을 장악했다. 이번의 북한·일본 간 교섭이 지난번과 다른 점은 북한 측에서 먼저 공을 던져왔다는 점이다.

첫 번째 공은 전권을 장악한 지 불과 3개 월 후인 2012년 7월 김정은 제1위원장이 그의 유일한 일본인 친구를 평양으로 초대한 것이었다. 13년간 ‘김정일의 요리사’로 일했던 후지모토 겐지 씨다. 다음은 후지모토(藤本) 씨에게서 필자가 직접 들은 이야기다.


▎아베 일본 총리(왼쪽)와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정상회담을 거쳐 수교에 합의할 수 있을지 동북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북일 교섭의 불씨 살린 ‘김정일의 요리사’

후지모토 씨는 7월 22일 낮, 그리웠던 김씨 왕조의 ‘관저(官邸)’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과 ‘눈물의 재회’를 한 후, 4시간 가까이에 걸쳐 긴 점심을 가졌다. 그때 김정은 제1위원장 앞에서 “일조 국교정상화의 달성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요코타 메구미(橫田めぐみ) 씨를 비롯한 납치 피해자를 일본으로 돌려 보내달라”라는 내용의 ‘직소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김정은은 아무 말 없이 직소장을 건네받았다고 한다.

후지모토 씨의 방북은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위대한 민간외교다”, “적국의 독재자에게 넙죽 엎드린 매국노다”라는 찬반양론이 일어났는데 이때 김정은이 깨달은 것은 “일본과는 납치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지 못하면 관계가 진전될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2013년 5월, 북한 측은 두 번째 공을 던져왔다. 이번에는 고이즈미 방북의 숨은 공로자이자 중심인물이었던 고이즈미 전 총리의 수석비서관 이지마 이사무(飯島勳) 내각참여를 평양으로 초대한 것이다. 다음은 수상관저 간부가 밝힌 내용이다.

“당시 이지마 참여는 김영남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들과의 회담에서 ‘아베 총리는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열망하고 있다’라고 역설했습니다. 북한 측은 ‘국교정상화를 열망하고 있는데 왜 일본은 우리 조선에게 독자적인 경제 제재를 가하는 것인가’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지마 씨는 아베 총리의 터키 방문에 맞춰 은밀히 터키에 입국하여 일본 정부 전용기에 터키산 최고급 카펫을 산처럼 쌓은 채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비밀리에 북한에 보낸 것입니다. 이것이 제재 해제에 대해 일본이 북한에 보낸 시그널이 되었습니다.”

이 수상관저 간부에 따르면 2014년 들어서 북한의 접근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북한 측에서 ‘일본 측의 현안사항(납치 문제)도 포함시켜 협의하며 조속한 국교정상화를 목표로 하고 싶다’라는 자세를 보인 것입니다. 이에 우리들도 호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일본과 북한은 먼저 예비교섭으로서, 1월 25일과 26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비밀모임을 가졌다. 베트남을 선택한 것은 ‘주변국 중 친중(親中)이 아닌 나라’를 북한 측이 희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2002년 일본과 북한의 정상이 일조 평양선언에 서명한 후, 국교정상화가 좌절된 것은 납치와 미국이라고 하는 ‘두 개의 허들’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노이에서는 그때의 교훈을 되살려 일본과 북한이 각각 숙제를 짊어지기로 했다. 북한의 숙제는 ‘납치문제의 상징’으로 알려진 요코타 메구미 씨의 딸 김은경 씨를 제3국에 데리고 가서 요코타 메구미 씨의 부모와 만나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 국내에서의 납치문제에 대한 배려였다.

일본은 아베 총리가 미국을 설득하기로 했다. 특히 4월 하순에 방일하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북한과의 국교정상화 교섭을 협의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는 것이 숙제가 됐다. 이렇게 해서 3월 10일에서 14일까지 요코타 시게루(橫田滋) 씨와 요코타 사키에(橫田早紀江) 씨 부부가 몽골의 울란바토르에서 김은경 씨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한 살이 되는 딸과 대면했다. 앞서 말한 수상관저의 간부는 이렇게 밝혔다.

“애초에 이 만남은 극비리에 진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요코타 부부에게는 변장용 마스크까지 건네줬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나리타 공항에서 몽골 항공기를 타자마자 마스크를 벗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연히 같은 비행기에 탄 전 요코즈나(橫綱, 스모 챔피언)인 아사쇼류(朝青龍)에게 들켜버렸고 우리는 언젠가는 이야기가 밖으로 세어나갈 것이라고 판단되어 공표하게 됐습니다.”


▎지난 4월 일본 국빈방문에 나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3일 도쿄 긴자의 유명 스시집 ‘스키야바시 지로’에서 아베 총리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아베 총리, 미국 설득의 총대 메다

필자는 정부 공표 후 곧 바로 요코타(橫田) 부부 취재를 했는데 그렇게 희색만면한 요코타 부부는 처음이었다. 일본과 북한의 ‘작전’이 잘 맞아 들어간 것을 짐작케 했다. 3월 30일과 31일에는 베이징에서 1년4개월 만에 북일 정부 간 협의가 열렸다. 일본측 대표는 이하라 준이치(伊原純一) 외무성 아시아 대양주국장이며, 북한측 대표는 송일호 조일 국교정상화 담당 대사다. 베이징에서는 ‘중국의 도청우려가 없는 단 두 개의 건물’인 북한대사관과 일본대사관의 회의실에서 가졌다. 2일간에 걸친 회담의 종료 후 양국 대표는 희색만면이었다.

그리고 5월 26일에서 28일까지 북한이 희망한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우호국’ 스웨덴에서 북일 정부간 협의가 재개됐다. 이 협의에서는 큰 진전이 있었고 다음날인 29일에 아베 총리가 긴급 기자회견을 가졌다. “북한은 납치문제를 비롯한 일본인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사를 표명했으며 납치문제에 관해서는 조속히 재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일본은 사태의 진전을 끝까지 확인하면서 독자적인 경제제재를 단계적으로 완화하기로 했다.”

일본과 북한 사이에 가로막고 있었던 ‘거대한 산’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6월 10일에서 12일 사이 이하라(伊原) 국장이 방미하여 미국 정부 당국자에게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에 대한 설명을 완료했다. 필자는 앞으로 일본과 북한의 국교정상화 교섭이 단숨에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다음의 7가지 조건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김정은의 역량 부족

선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배짱과 신중함의 양면을 겸비한 노련한 지도자였다. 필자는 2002년과 2004년에 고이즈미 총리를 수행 취재한 평양에서 ‘언제나 필사적인’ 김정일 외교의 능수능란함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부하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통찰력, 타인에 대한 철저한 시의심(猜疑心)과 신상필벌, 그런 가운데에서도 때때로 보이는 정(情)과 같은 것이다. 이에 비해 김정은이라는 지도자는, 아버지의 단면, 다시 말하면 배짱밖에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모하다. 때문에 지금의 북한 외교력이라는 것이 형편없는 것이 돼버렸다. 이는 일본 입장에서는 분명 기회가 될 것이다.

2 납치문제에 책임 없는 김정은

납치문제는 100%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책임이다. 1983년 생인 김정은에게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 김정은은 기본적으로 아버지 세대의 간부들을 ‘아버지와 국가를 먹잇감으로 삼아 나라를 쇠락하게 만든 악인들’로 보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납치문제를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정은은 “아버지 세대의 범죄에 대해 조속한 결말을 맺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2013년 7월 27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정전 60주년 열병식에 등장한 북한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무수단. 단기적으로 북일 수교협상의 최대 걸림돌은 역시 북한의 핵실험이다.



‘사면초가’ 김정은 외교의 탈출구 될지도

3 장성택 처형의 여파

장성택과 그 측근들은 대일외교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김정일 위원장의 충실한 심복으로서 오랜 외교경험을 축적하고 김 위원장에게 조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해 말 장성택 처형에 의해 김영일 노동당 국제담당 서기를 시작으로 대량인사가 실각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최고지도자의 브레인이었던 외교담당 측근들이 현재는 전무하다. 유일하게 강석주 부총리가 남아있지만 이미 고령으로 건강상태도 좋지 않다고 한다. 이러한 ‘노 가드(no guard)’의 상황 역시 일본에 유리하다.

4 사면초가의 김정은 외교

지금까지는 “중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미국과 싸운다”고 하는 것이 북한 외교의 ‘기본자세’였다. 김대중·노무현 시대의 10년간은 한국도 북한 편이었다. 그런데, 김정은 제1위원장은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강경하게 반대한 핵과 미사일 실험을 강행했고 친중파의 대부인 장성택을 처형해서 시진핑 정권을 완전히 적으로 돌려세워버렸다. 때문에 북한의 생명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국의 연간 50만t의 원유 원조도 올 들어 전면 중단됐다. 한국, 미국과의 관계도 여전히 좋지 않다.

따라서 북한으로서는 일본에서 활로를 찾아내는 길밖에는 방법이 없다. 특히 가을 수확기까지 식량을 얻는 것은 불가피한데, 100만t의 군사용 비축미 가운데 이미 70만t을 방출했다는 정보도 있다. 여름의 전력부족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기대하던 나선 경제특구에서의 송전계획은 중국 측의 중단에 의해 물거품이 됐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5월 23일 조총련 제23회 전체 회의에 ‘축하전문’을 보냈다. 전문은 지금까지의 쌀쌀맞은 ‘연하장’과 비교하면 실로 ‘따뜻한 메시지’가 적혀 있다. 이는 최근까지 소원했던 조총련에 대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새로운 러브콜이라 봐야 할 것이다.

5 아베&사이키(齋木) 콤비

2002년과 2004년의 고이즈미 방북 때 콤비를 짰던 아베·사이키가 현재 총리와 외무차관으로서 일본의 대북 외교를 총괄하고 있다. 때문에 현재는 정권 내에서 의견이 대립되는 문제는 전무하고 대북 외교의 프로 진영이 갖추어진 상태다. 그들이 프로라고 보는 일화로 두 가지 소개하겠다.

하나는 5월 28일의 북일 양국의 합의로 “납치문제 등에 관한 ‘특별조사위원회’를 북한이 설치하고, 납치문제를 북한 측에 재조사시킨다”고 발표했다. 5월 29일의 수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왜 일본 측이 조사에 참가하지 않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애매하게 답했다. 이는 만약 일본도 참가하게 되면 “일본 측도 참가한 위원회에서 이런 결론이 났기 때문에 이제 그만 포기해라”라고 북한 측에 반대로 이용당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서는 2004년 11월의 ‘야부나카(藪中) 북한방문단’ 때에 북한이 요코타 메구미 씨의 가짜 유골을 들려 보내 하마터면 납치문제가 그대로 종결돼버릴 뻔한 뼈아픈 경험이 있다. 그런 점 때문에 북측에 재조사를 전담시키면 일본은 얼마든지 여러 번 조사를 요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번 합의에 앞서 요코타 메구미 씨의 부모를 몽골에서 손녀 일가와 만나게 해서 원 쿠션을 둔 것이다. 요코타 메구미 씨는 잘 알려진 대로 ‘납치 문제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로, 만약 2002년의 시점에서 그가 일본에 귀국했더라면 북일관계는 한층 진전되었을 지도 모른다. 때문에 아베 정권은 먼저 요코타 씨 부부에게 ‘선물’을 줘 분위기 조성을 도모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일화를 보아도 일본 측이 이번 일을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추진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6 미국의 외교 사이클

다음은 일전에 전 주미 일본대사와의 회식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클린턴, 부시 주니어, 오바마라고 하는 3대에 걸친 미국 정권의 외교 패턴은 사실 아주 닮았다. 미국 대통령이 되면 먼저 중동외교를 해결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취임 1기에 중동외교에 전념하다 보면 그 복잡함에 질려버린다. 그래서 2기째가 되면, 더 쉽게 외교성과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찾게 되고 ‘이런! 북한이 있지 않은가’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때문에 마지막에는 대북 외교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 ‘중동→북한 이론’에 의하면 올해 11월에 있을 중간선거에 즈음해서 오바마 정권은 빠른 속도로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일에 착수하려 할 것이다. 일본이 이 흐름을 타고 미국과 보조를 맞추면 ‘순풍’을 타고 북한과 교섭할 수 있으리라는 의견이다.

되짚어보면 고이즈미 총리가 대 북한 외교에 열을 올린 2002∼2004년은 부시 정권의 1기에 해당하며 북미 관계에서는 강한 ‘역풍’이 불었던 시기다. 부시 대통령은 2002년의 일반교서 연설에서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비난했는데, 이처럼 미국이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상황에서 동맹국인 일본은 미국의 의사에 반하는 외교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중관계 및 한일관계 개선과도 직결되는 것”

7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사이클

북한은 2006년 10월과 2009년 5월, 2013년 2월에 3번에 걸친 핵실험을 강행하고, 각각 그 수개월 전에 핵탄두를 실을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의 실험을 감행했다. 북한이 미사일 실험을 한 번 하는데 10억 달러, 핵실험에는 20억 달러가 든다고 알려졌다. 즉 두 가지를 병행하면 북한의 국가예산 절반 가까이가 한순간에 날아가버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러한 예산문제와 함께 기술력을 버전업 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고려해볼 때 핵미사일 실험은 3년에 한 번 정도만 가능하다. 즉 올해는 핵미사일 실험의 ‘적기’가 아니다. 현재로서는 일조 교섭이 틀어질 수 있는 가장 큰 변수는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강행으로 인한 지역정세 악화인데, 이 변수를 피할 수 있는 올해는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의 7가지 이유로, 이후 북일 교섭이 진전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말하고 싶다. 최대의 포인트는 어느 시점에서 ‘납치문제 해결→국교정상화’라고 하는 지금까지의 단선적인 흐름을, ‘국교정상화→납치문제 계속 협의’라는 ‘복선(병행 협의)’으로 바꿀 수 있을지 하는 것이다. 즉, 아베·사이키 콤비가 과거 그토록 혐오하던 후쿠다·다나카 콤비가 만든 ‘북일 평양선언’의 정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에 이번 교섭의 성공여부가 달려 있는 것이다.

현재의 동북아는 기묘한 구조가 돼버렸다. 지금까지 전통적인 ‘한·일 대 북·중’이라고 하는 구도가, ‘한·중 대 북·일’이라는 구도로 변화하려고 한다. 5월 26일에는 왕이(王毅) 중국 외무장관이 방한하여 “현재의 한·중관계는 사상 최고의 우호적인 상태에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필자가 앞서 말한 총리관저 간부에게 이 점을 지적하자, 그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라고 대답하면서 이렇게 부연했다.

“동북아에서의 일본 외교의 철칙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한국은 한일관계를 단순한 쌍방관계로 보지만 일본은 한일관계, 혹은 북일관계를 항상 중국을 염두에 둔 3개국 간의 관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북한과 국교 정상화 교섭을 하면서도 늘 중국을 의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베 총리는 ‘북한과의 교섭을 진척시키는 것으로 11월의 베이징 APEC(아시아태평양경제 협력회의)에서 시진핑 주석과 일중 정상회담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계기로 중국이 일본을 중시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제2의 철칙은 ‘한국은 중국의 뒤를 따라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일본이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야말로 일중관계 및 한일관계 개선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지난 4월 일본을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은 북일수교 협상의 진행에 대해 양해하면서, 아베 총리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 모든 프로세스를 하나하나 자세히 미국에 보고해줄 것,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방지하는 방향으로 행동할 것 등이었다. 이번 교섭이 어떻게 끝날지 아직 그 결론은 모른다. 그러나 2014년 동북아시아는 격동에 휩쓸리고 있다는 예감이 든다.

201407호 (201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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