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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특집 -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나타난 근·현대의 한국 

‘청년’ 대한민국, 꿈과 열정만으로도 행복했네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한국전 참전 하워드 소추렉(Howard Sochurek) 기자가 전하는 1969년 한국사회의 파노라마, 울산화학단지-신진자동차-삼성물산-가발공장-농촌까지 경제개발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



우연히 접한 1969년판 <내셔널지오그래픽>에는 그간 우리가 잊고 지낸 한국의 근대사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은 희미한 기억으로만 있는 그 시절 한국인들의 고단한 노동과 땀 냄새가 책장을 펴는 순간 와락 달려들었다.

지난 연말,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미국인 친구가 사는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 들렀다. 불과 3일간 머물렀지만 기억에 선명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추운 날씨 때문이었다. 이 도시에는 눈과 인연이 많은 북유럽의 이민자가 많이 산다. 일리노이주 전체가 그러하지만 겨울에는 하루 종일 눈이다.

추운 날씨 탓도 있지만, 특별한 관광지도 없어 바깥출입은 아예 포기했다. 사흘 내내 2층 서재에 박혀 친구의 아버지가 모아놓은 오래된 책 읽기가 일과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사병으로 일본과 한국 전선을 오간 퇴역군인이었다. 필자를 보는 순간 그는 서울·부산·대구 같은 곳의 지명을 되새겼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퇴역군인은 21세기 들어서도 만날 수 있는, 진행형 역사의 증인이다.

잡지 <내셔널지오그래픽>(이하 내셔널)은 친구의 할아버지때부터 구독한 도서라고 한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수백 권의 책이 서재 위에 깨끗이 진열돼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부자와 빈자 간의 소득격차 문제가 부각됐지만, 20세기의 미국은 상하가 없는 중류층 나라의 전형(典型)이다. 풍부한 자원과 넓은 국토 덕분에 일자리를 갖고 있는 한 누구나 중류층으로 안정된 삶을 즐길 수 있다.

내셔널은 그 같은 중류층을 위한 국민 잡지에 해당한다. 중류층이라면 내셔널을 구독하고, 내셔널을 구독한다는 것은 중류층의 증거다.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풍경, 나아가 우주의 심연(深淵)을 전해주는, 세계와 우주를 향한 잡지라고 할 만하다.


▎1969년 제주도 바닷가에서 수영 중인 어린이들. 기자는 이들을 어부로 생업에 종사할 운명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그들은 1970년대 한국 산업화의 역군으로 나선다.
초기에는 글만 실었지만, 햇수를 거듭하면서 전문 사진사를 통한 현지 사진을 게재하는 등 보고, 읽고, 느끼는 잡지로 변모해갔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오지(奧地)의 지도는 내셔널의 매력이자, 자랑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관심과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잡지다.

쓸쓸한 눈빛의 51세 박정희

내셔널 1969년 3월호가 눈에 들어온 것은 친구 집에 머무른 마지막 날이었다. 잡지 내용을 대략 훑어가던 중, 눈에 익은 사진이 하나 들어온 것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을 되새기기에 충분한 사진이었다.

벌거숭이 몸으로 수영을 하다가 물 밖으로 나온 10세 미만의 아이들 모습이다. 지금의 한국인들이 본다면 동남아시아나 다른 인종이라고 착각할 듯하다. 갈비뼈가 튀어나온 앙상한 모습은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북한 아동들을 연상케 한다. 한눈에 과거 한국의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주 오래된 사진이지만, 강에서 아이들과 멱을 감던 필자의 어린 시절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다. 곧 쓰러질 듯 보이는 약한 몸을 가졌지만, 모두가 활짝 웃고 있는 기(氣)가 넘치는 어린이들이다. “제주도에서 수영하는 어린이. 그들은 곧 생업을 위해 어부로 일해야 할 것이다. 제주도는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할 때 군 요충지로 활용한 군사전략지이기도 하다.”


▎뭔가 쓸쓸하고, 눈물이 밴 듯한 얼굴의 당시 박정희 대통령. 대중적으로 어필하기보다 실무에 강한 느낌을 주는 표정이다.
작은 서체로 쓴 사진설명을 통해 사진 속 주인공들이 제주도 바닷가에서 수영하던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1969년 3월호 내셔널은 한국을 특집으로 다룬 기사들로 채워져 있다. 글이 실린 전체 143쪽 가운데 한국특집이 무려 43쪽을 차지한다. 전부 컬러판으로 채워져 있다.

‘한국=한국 전쟁’으로서의 특집이 아니다. 전쟁고아와 헐벗은 땅으로 대표되는 어둡고 차가운 나라가 아니라 희망과 함께 살려고 몸부림치는 활기찬 한국의 모습이 주제다.

한국의 어제나 오늘보다, 내일에 초점을 맞춘 기사다. 필자가 아는 한, 밝고 미래지향적인 차원에서의 한국을 그린, 최초이자 최대의 스페셜 리포트가 아닐까 싶다.

수영하는 어린이들을 보면서 앞쪽으로 페이지를 넘기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하 박정희)이 눈에 들어온다. 51세 때의 모습으로 측면(側面) 사진이다. 처음 본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묘한 감정이 끌어 오른다.

일단, 종전에 알고 있던 박정희의 모습이나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검은 안경을 쓴 채 부동자세로 부하들에게 둘러싸인, 군복 차림의 차가운 이미지가 아니다. 한국산업화의 초석을 다진 근대화의 기수로 등장하는, 시골노인과 막걸리를 즐기는 서민적인 모습의 박정희도 아니다.

언뜻 봐선 슬픔에 젖은 듯한, 외롭고 어두운 분위기 속의 나약한 인간이다. 앞서서 말하기보다, 뒤쪽 어딘가에 서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미지다.

1969년 10월 17일 박정희는 3선 개헌에 이어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다. 1971년부터 시작되는, 이른바 유신체제를 구상하던 시기의 모습이 내셔널에 실린 셈이다. 그러나 3선 개헌안 통과를 위한 뜨거운 권력의지가 사진 속에 드러나 있지 않다.

시선을 쉽게 뗄 수 없는 부분은 박정희의 눈이다. 눈물이 밴 듯하다. 그러나 약하고 자신감을 잃은 눈이 아니다. 보는 이를 강렬하게 빨아들이는 뜨거운 눈빛이 눈물 속에 녹아 있는 듯하다. 닫힌 입술이지만, 눈을 통해서는 뭔가를 말하려는 듯하다. 미국인 친구에게 박정희 사진을 보여주며 어떤 느낌이 드는지 물어봤다. 박정희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그이지만, “정열(Passion), 겸허(Humbleness)과 정직(Honesty)”이 사진에서 느낀 그의 이미지라고 말했다.

겁에 질린 김신조와의 인터뷰

기사 제목은 ‘아시아의 성공 스토리(Success Story of Asia)’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기자는 하워드 소추렉(Howard Sochurek)이다. <라이프>지(誌)에서 20여 년간 일한 베테랑 저널리스트로, 1955년 최고의 보도사진에 수여하는 ‘로버트카파상(賞)’을 수상했던 인물이다.

프린스턴 대학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사진작업뿐만이 아니라 글도 쓰는 전천후 기자다. 사진을 컴퓨터와 연결해 사용한, 20세기 말 포토저널리즘의 기수로도 잘 알려져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도 참가해 많은 사진과 글을 <라이프>지에 실었다.

한국전쟁의 경우는 1950년 10월, 미군의 평양 북쪽의 숙천 공격 때 군인들과 함께 낙하산을 타고 내려 종군했다. 미군 구출과 퇴각하던 북한군 섬멸을 위한 공수(空輸)작전으로 알려졌다. 내셔널 1969년 3월호 기사는 소추렉이 전쟁 이후 다시 한국에 처음 방문해서 쓴 기사였다. 취재는 1968년 여름부터 시작했지만 기사는 이듬해에 게재됐다. 18년 만에 다시 들른 한국의 방문기다. 전쟁 당시의 척박한 기억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한국의 모습을 카메라와 글에 담았다.

필자는 스프링필드에서 이 기사를 발견한 후 곧바로 소추렉 기자의 행방을 알아봤다. 먼저 워싱턴 한복판에 있는 내셔널 본사에 들러 연락처를 수소문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1994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고인의 가족을 찾아봤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한국인에겐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지만, 세월은 이미 저만큼 흘러가 있다. 소추렉 기자의 글은 1968년 1월 21일 남파됐다가 생포된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와의 인터뷰에서 시작된다.

한국전쟁은 끝났지만,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에 있음을 암시하는 듯한 기사 구성이다.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은 미군해병대가 지키는 최전선에 해당된다. 26세의 김신조는 정보요원과 함께 한 중국음식점에서 미국 기자와 대면한다. 그 자리에서 김신조가 주문한 음식은 베이징덕 요리였다.

“김신조는 남파된 북한 124군부대 무장공비 31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이다. 그들의 남파 목적은 박정희의 목을 따기 위해서다. …김신조와 무장공비는 남파 도중 4명의 나무꾼을 만난다. 당장 죽이자는 대원도 있었지만, 겁에 질린 나무꾼이 신고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절대 신고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살려 보낸다. 곧 치명적인 실수로 드러났다. 나무꾼들이 곧바로 경찰서로 달려가 신고한 것이다. 서울 전역이 비상에 걸린다.”

소추렉 기자가 찍은 사진 속의 김신조는 뭔가 잔뜩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이다. 요즘은 목사로 활동한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소추렉 기자를 만났을 때의 기억이 어떠할지 궁금하다. 기자는 20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어정쩡한 양복차림으로 나타난 무장공비가 지금은 목회자로 신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김신조와 인터뷰를 마친 뒤 소추렉은 서울거리로 나선다. 그곳이 어디인지 언급 없이, 상점과 식당으로 채워진 번화한 곳이라고 썼다. 18년 전에 김포공항에 C-54수송기를 타고 서울에 내렸던 전쟁 당시의 서울을 돌이키기도 했다. “당시 17만 명이 머물던, 시신과 전쟁의 잔해로 얼룩진 곳이 서울이다. 도심 곳곳에는 더러운 옷을 입은 고아들로 넘쳤다. 그들은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전선이 여기저기 늘어져 도로 위를 덮고 있었고, 내가 타고 가던 지프의 바퀴는 포탄에 패인 시궁창에 빠졌다. 1968년 서울은 100만 인구로 늘어났다.”

소추렉 기자가 경험했던 전쟁 당시의 한국에 대한 언급은 거기까지다. 울산화학단지와 서울-부산을 잇는 고속도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당시 미국대사 윌리엄 포터를 비롯한 서울에 거주한 미국인 대부분은 한국의 미래를 보려면 울산에 가보라고 권한다. 미국대사가 권한 울산은 아마도 당시에 한국이 내세울 수 있는 산업화의 유일한 본보기에 해당되지 않았을까 싶다. 포항종합제철이 문을 연 것은 1970년대였다.


▎1969년 국내 한 제철소의 근로자. 어깨와 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산업의 동맥에 해당하는 제철소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꿈꾼 필생의 사업이었다.



최고의 희망 속에 살던 시절

“일제시대 때 소나무 뿌리와 껍질을 캐내 먹으며 연명했다.” 50대 이상의 장년들이라면 선대(先代)로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던 못 먹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부모가 당한 어제의 고통을 아무리 자주 듣는다 해도 현재의 삶의 고마움을 깨닫는 이는 드물다. 필자 역시 어제의 고통을 강조하며 오늘의 행복을 찬미하는 식의 얘기에는 관심이 없다. 어제의 고통은 어제의 몫일 뿐이다.

어제의 대통령을 입에 올리거나 절대시하면서, 가난했던 시대에나 통했던 논리나 상황을 역설할 필요는 없다. 어제의 역사, 어제의 인물은 경험이자 교훈으로서 충분하다. 오늘과 내일은 시대를 살아가는 당대의 주인에게 맡겨야 하는 까닭이다.

“그토록 가난하고 못 살았던 당시…”라는 식의 얘기가 오늘날 한국의 신문·방송의 고정 메뉴로 자리 잡고 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한결같이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불굴의 한국인이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철강왕 카네기의 말이다.

“우리는 그때 모두 가난했다. 고맙게도 우리는 그때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가난하다고 느끼면서 자라는 사람은 드물다. 끼니를 못 때울 정도의 극단적인 가난은 예외겠지만, 부풀려지고 비교하면서 가공된 스토리가 대부분이다. 숨길 이유, 과장할 필요도 없는 것이 가난이다.

내셔널의 글을 발견했을 때 필자의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렇게 못살았던 한국이!”라는 식의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건설 중인 청계고가도로 주변과 짚으로 뒤덮인 인력거, 촘촘하게 늘어선 시골 초가집 풍경을 통해 당시 한국의 경제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 210달러이던 1969년이, 2만 달러를 넘어선 2014년의 한국보다 100배 이하의 삶을 살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단군 이래 최고의 희망 속에 살던 그 시절 한국인들의 드높은 기상이 가슴속에 와닿을 뿐이다. 남 탓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서, 서로를 의지하고 웃으면서 살아가던, 한국인의 미덕과 저력이 돋보이던 시대의 초상화 말이다.

소추렉 기자의 한국 취재를 도운 통역사 김광식을 통해 그 당시 한국인들이 가졌던 가치관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김씨는 시골에서 자랐다. 고향이 전쟁으로 고통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현재 빠른 속도로 근대화에 나선 3천 만 한국인의 구성원이 된다. ‘사람만이 우리의 유일한 자산입니다. 우리의 인적 재원을 적극 활용해 선진 산업국가와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인적 자산을 통한 경제발전은 통역사 김광식조차 알고 있었던 당시 한국의 유일한 처방책이다. 김광식의 생각은 45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변함없는, 한국적 발전이론의 초석이다. 사람이 유일한 자산이다. 김광식의 생각은 소추렉 기자의 글과 사진을 통해서 충분히 나타나 있다. 인천종합제철에서 땀 흘리는 근로자의 모습도 그렇다. 그의 등뒤로 흐르는 땀방울에서는 당시 한국인들이 어떤 자세로 일을 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신진자동차 조립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 기자는 자동차를 전량 수입하기보다 직접 손으로 조립해서 자동차산업을 시작한 한국인들을 높게 평가했다.
시골 공업도시 울산의 ‘충격’

당시 차량 한 대 값이 근로자의 월급 5년치에 해당하던 자동차를 ‘손으로’ 만드는 신진공업사 근로자들의 모습도 담겼다. 당시 신진자동차의 판매대수는 ‘7천 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18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미국인 기자가 주목한 것은 한국인들이 직접 차를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일본 도요타 자동차의 조립차량이지만, 완제품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는 자세에 놀란다.

완제품을 수입하는 한 자동차 산업은 영원히 일어날 수 없다. 한물간 자동차 모델의 조립품이긴 하지만, 한국인의 손으로 직접 시작한 것이 자동차 산업이다. 자동차 생산의 역사가 반세기에 불과한 한국이 자동차산업의 원조국가에 해당하는 미국에 자동차를 파는 출발점이 이러한 도전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소추렉 기자는 울산을 ‘충격’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1962년까지만 해도 시골에 지나지 않았던 울산이 한순간에 전천후 공업단지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미국·일본·독일로부터 약 20억 달러의 투자금을 끌어들여 쿠웨이트산 원유를 정제하는 곳이 울산이다. 통역사 김광식은 울산이 언젠가는 미국의 피츠버그나 일본의 오사카에 버금가는 곳이 될 것이라고 자랑한다. 그 같은 예언은 오늘날 이미 현실이 되었다.

소추렉 기자는 제2차 세계대전·한국전·베트남전을 경험한 종군기자인 동시에, 전 세계를 돌며 기사를 쓴 인물이다. 내셔널에 실린 글을 보면 단순히 표면적인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배경과 원인을 파고드는 심층분석이 돋보인다. 울산에 들러 마른 오징어와 맥주·김치를 즐기면서,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미국 젊은 청년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그는 당시 미국인의 절반 정도가 25세 이하일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의 참상과 바깥 세상에 무심한 청년들을 염두에 두면서 역동적인 한국 이야기를 기사에 담고자 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한국은 분단된다. 인구 900만의 공업화된 북한은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간다. 곧바로 공산정권이 들어선다. 농업과 수산업이 전부인 1900만 인구의 한국은 1948년까지 미군정에 의해 통치되다가 이후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양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김일성은 남침에 들어간다.…”

전쟁만이 아니라, 한국사의 전반을 얘기한다. “한국의 옛 지명인 조선이란 말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 Calm)’란 의미다.” 신라·고려·몽골 침입·조선 건국·일제 침략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역사가 간결하면서 알기 쉽게 설명돼 있다. 소추렉 기자는 당시 이미 한국경제에서 중요 인물로 떠오른 이병철 당시 삼성물산 회장도 만났다. 이 회장을 직접 만나 한국 경제개발과 관련된 의견을 물었다.

“그는 12개 이상의 제조공장을 가진 삼성물산 회장이다. 한국 내 35개 신문사 가운데 하나를 보유하고 있고, 전국망 텔레비전 한 개를 소유하고 있다. …이 회장은 나를 새롭게 단장한 그의 5층 사무실로 안내했다. …나는 그에게 소수 경영자에게 집중되는 재벌기업 문제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답했다.

‘물론 재벌기업에 의한 집중 경영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분의 얘기일 뿐입니다. 알다시피 경제규모가 갑자기 커지면서 정부의 관여도가 커지고 있습니다. 경제계획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정부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부의 관여가 지나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부와 기업은 남편과 아내와 같은 관계입니다. 박 대통령은 산업발전을 국가발전의 초석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1969년 당시의 청계천 고가도로 건설 현장. 일본 도쿄 내 도시고속도로를 흉내 낸 것으로 도시 미관을 해치는 산업화의 흔적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우고 이명박 전 대통령이 철거했다.



이병철 회장 “경제개발 주역은 박 대통령”


▎당시 국내 가발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근로자들. 월급으로 33달러를 받는 이들이 만든 가발은 미국에서 개당 50달러에 팔렸다.
소추렉 기자는 이 회장의 말을 끊으며 “누가 한국 경제개발의 주인공이냐?”고 묻는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이 회장은 주저 없이 대답한다. “그는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습니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박정희는 한국의 산업화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의 후손이 그때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때 우리는 조국의 산업화에 매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 회장과의 대화는 그쯤에서 끝났다. 이어진 글은 가발공장 여성근로자의 얘기다. 최고 경제인과 최일선의 근로자를 비교하면서 쓴, 저널리즘의 기초에 충실한 글이다. 여성근로자의 월급은 9천 원으로, 당시 미화 33달러에 상당한다.

1969년 미국의 1인당 평균 월급은 400달러 선이었다. 여성 근로자의 일은 인도와 인도네시아에서 수입된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펴고, 씻고, 염색하는 것이다. 가발 하나 만드는 데 필요한 손 작업은 30시간을 필요로 한다. 한국에서는 9달러에 팔리지만, 미국에서는 50달러에 팔리는 고가품이라고 한다. 가발 하나 만들면 한국 여성 근로자의 한달 생활이 보장되던 시대다.

소추렉 기자가 만난 근로자는 막 시골에서 올라온 여성으로, 아버지는 어부다. 가족에 대한 얘기할 때 눈물을 흘리는, 착하고 부끄러움 많은 소녀다. 시골에 이미 그녀의 남편이 될 만한 사람이 결정돼 있을지도 모르지만, 도시에서 일하는 동안 새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녀를 축복해준다.

노동조합이 없고, 노동자 권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한국이었지만 소추렉 기자는 여성근로자의 현실과 배경을 통해 곧 닥칠 상황을 암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셔널 기사가 나간지 1년 뒤인 1970년 11월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던 청계천 근로자 전태일이 분신한다.

그의 한국취재기 중 더욱 흥미를 끄는 부분은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인 이구(李玖)와의 만남이었다. 이구는 대한제국 황족으로, 고종의 아들인 영친왕 이은(李垠)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20세기 중 한국에도 가끔 들리던 일본 여성, 이방자(李方子) 여사다. 도쿄(東京)에서 태어나 일본식 교육을 받은 뒤 전후(戰後)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공부했다. 전공은 건축학이다. 1963년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아버지 영친왕이 한국생활을 시작하면서 황태자인 이구도 뉴욕생활을 접는다. 영친왕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 임명된 조선왕이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한국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중에 병환이 심해지자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체류를 허락한다. 이구는 전공을 살려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건축학 교수로 일한다. 기자와의 만남은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 머물면서 교수로 있을 때 이뤄진 것이다. 이구는 당시 미국 시민권자였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구. 그는 미국에서 돌아와 서울대·연세대에서 건축학을 가르쳤지만 일본의 호텔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나의 관심사는 한국의 위대한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한국 정부에 나의 우려를 전달했습니다. 새로운 고가도로가 한세기가 넘은 문화 유적을 가로지를 계획입니다만, 주변보호를 위해 제고돼야 합니다.”

‘마지막 황태자’ 이구와의 만남

황태자의 인터뷰는 문화재보호론으로 시작된다. 황실의 영광이나 부활의 얘기는 전혀 없다. 당시 한국에서 이구의 문화재보호론은 왕족의 배부른 소리처럼 들렸을 듯하다.

남대문 현판 하나로도 난리를 치는 것이 오늘날 21세기의 한국이지만, 1969년의 한국은 종묘 위 고가도로 건설쯤은 ‘새발의 피’정도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이구는 기자를 창덕궁과 종묘로 안내하면서 한국 건축의 의미를 알려준다. 소추렉은 윤선도의 시 ‘오우가(五友歌)’를 조리며 황태자와 함께 ‘올드 서울’을 취재한다.

당시 인터뷰가 미국 기자의 희망에 의한 것인지, 한국정부의 제안으로 이뤄진 것인지를 알기 어렵다.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정략적으로 유지된 조선왕실은 이승만만이 아니라, 박정희에게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어떤 배경에서 인터뷰에 응했는지 모르지만 정치적 의미를 갖는 황태자가 아니라, 건축학 전문가로 내셔널과 만나고 있다.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인터뷰가 이뤄졌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해진다. 1931년생 황태자 이구는 2005년 7월 16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도쿄 아카사카(赤坂) 프린스 호텔이 최후를 맞은 장소다.

이구가 졸업한 뒤 가진 첫 직장은 현재 세계 건축계의 최고봉에 속하는 중국계 페이(Pei)의 뉴욕사무소다. 당시 페이는 지금과 같은 지명도를 갖지 못한, 작은 동양계 건축회사에 불과했다. 이구가 미국에 그대로 머물렀더라면 페이에 버금가는 세계적 건축가로 부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황실의 비극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이구의 행적 중 일부가 내셔널에 소개된 것이다. 소추렉 기자가 찍은 이구의 모습은 당시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세련된 모습이다. 황족으로서가 아니라, 지식인으로서의 품격이 느껴진다.

내셔널 기사는 이후 판문점과 한국의 시골을 돌며 남북대치 상황과 농촌의 변화상을 보도한다. 기사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깊게, 그리고 애정을 갖고 쓴 글로 느껴진다. 통역사의 말을 듣고 그냥 받아쓰는 수준을 넘어, 기자 자신의 관심과 기억에 의해 만들어진, 땀이 스며든 현장 기사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제주도 해녀 고두심 씨도 흥미롭다. 앳된 모습의 10대 고두심 씨가 어떤 이유에서 내셔널 기자의 눈에 띄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한국이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해녀(海女)’의 근거를 이미 반세기 전에 보도하고 있다.

소추렉 기자는 글의 마지막을 경주에서 만난 시골 노인들의 얘기로 마감한다. 76세 동갑인 노반식·김홍필 옹 두 사람이다. “현재 생활이 좋아지고 있습니까?” 기자가 노반식 노인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우리는 세금도 적게 냅니다. 수확물이 시원찮을 때는 정부가 나서서 곡물도 나눠줍니다. 우리는 옷을 만들 옷감도 있습니다. 심지어 모두가 고무로 된 신발을 신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짚으로 만든 게 전부였습니다.”

불과 반세기 전 한국 농촌의 생활상이다. 하잘것없는 고무신이지만, 고마움을 느끼고 행복해 하는 노인의 육성이 마음을 울려주는 듯하다. 노반식 옹의 답변이 이어진다. “미국은 우리를 고통에서부터 해방시켜줬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강제노역과 우리를 침략한 공산주의로부터 한국을 구해준 고마운 나라입니다. 내가 말하는 얘기를 미국인에게 알려주면 고맙겠습니다. 미국이 우리를 구원해줬고, 우리는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은 그저 그런 보통사람들의 나라가 아니오”

의도적으로 가공된 발언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시 한국 노인의 대부분이 노 옹과 비슷한 생각을 했으리라 확신한다. 세계를 바꿀 이념이나 거창한 슬로건이 아니다. 먹을 것과 평화를 보장하는 게 정치의 출발점이다. 한국이 흔들릴 때 미국이 그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을 식민지·한국전쟁·박정희를 거친 70대 노인들은 잘 알고 있다.

1969년은 50대 이상의 장년이라면 대부분이 기억하는 특별한 해이기도 하다. 미국의 아폴로11호가 달에 착륙한 해이기 때문이다. 1969년 7월 19일. 기억에도 생생하지만, 동네주민 모두가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몰려들었다. 모두가 얼이 빠진 채, 달 착륙 장면을 위성으로 시청했다. 필자가 텔레비전을 보았던 동네의 쌀가게 주인이 큰소리로 외친 푸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저렇게 먼 곳에 뭐 하러 가는 거지? 저 돈으로 사람들 먹을 것을 주면 좋을 텐데!”

골동품의 가치는 세월의 무게에 비례해 희소성과 가치를 더해간다. 1969년 한국인의 자화상이 희소성의 시대에 들어간다는 의미다. 그 시대의 사람 대부분과 그 시대를 기록한 미국 기자도 세상을 떠난 지 오래다. 그러나 그 시대가 남긴 정열과 노력 그리고 희망은 아직도 살아 있다. 1969년 어느 날 미국인 기자의 눈에 비친 한국인들의 모습이 그 같은 희망을 갖게 한 근거다.

소추렉 기자는 경주의 노인 노반식이 던지는 한마디 말을 기사 말기에 담는다. 한국인 모두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신념에 해당되는 말이다. “기억하세요! 여기 한국은 그저 그런 류의 보통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아니오!”




201405호 (201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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