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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취재 - “빛과 그림자가 요동하는 그 속에 나의 피부가 들어 있다” 

호암 이병철 삼성 선대회장 자작시 첫 공개 

1958년 재경의령학우회지 <자굴산> 5집에 게재…시 ‘해변에서’ 통해 국가 재건에 땀흘리는 기업인의 성취감 드러내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1910~1987)의 자작시를 <월간중앙>이 입수해 처음으로 공개한다. 경남 의령출신인 호암은 1958년 ‘재경의령학우회’가 발간한 회지 <자굴산>에 실린 시 ‘해변에서’를 통해 전후 국가부흥에 동참하는 기업인으로서 강인한 열정과 감성을 담고 있다.

호암 이병철의 자작시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기막힌 우연이었다. 경기도 군포시 산본 신도시에서 헌책방 ‘장서각’을 운영하는 최현호(53) 씨는 기업체에 몸담았다 퇴직한 뒤 평소 관심 분야인 고문서 수집에 열을 올렸다. 그러던 최씨는 지난해 9월 서울의 한 골동품 경매장에서 <자굴산> 5집을 발견하게 된다. 가로 16.5㎝에 세로 24.5㎝ 크기의 이 등사본 책자는 서울에 유학 중이던 경남 의령출신 학생들의 모임인 ‘재경의령학우회’가 발간한 회지였다.

발간 일자는 ‘단기 4291년 7월 22일’로 서기 1958년에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책자의 표제는 붓글씨로 ‘자굴산’ 제5집이라고 쓰여 있고, 표지그림에는 자굴산을 배경으로 아담한 초가 한 채를 그려 넣었다. 134쪽 분량의 등사본 표지 좌측에는 한자로 ‘근정 칠곡면 의회의장 혜존’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서울에서 발행돼 의령군 칠곡면의회로 보내진 증정본으로 이해됐다.

많아 봐야 100권 정도 제작됐을 것으로 보이는 비매품 소책자였지만 195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와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고 판단한 최씨는 경매를 통해 그리 어렵지 않게 책을 구입할 수 있었다.


서울의 골동품 경매장에서 발견

그날 구입한 다른 고문서들과 함께 한동안 서가에 책을 쌓아두었던 최씨는 올 들어 <자굴산> 등 소장한 책자들을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책방 사이트에 입력하다가 책 서두의 목차에 수록된 시 한편에 눈길이 꽂혔다.

‘해변에서’라는 시였는데, 필자 항목에 ‘湖岩’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낯익은 호암 글씨를 보고는 자신의 서가에 보관하고 있던 이병철 선대회장의 자서전 <호암자전>을 꺼내들었다.

우선 이병철 회장이 의령출신인 것이 맞아 떨어졌다. 이병철 회장은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유학자인 경주 이씨 이찬우와 모친 안동 권씨 권재림 여사의 4남매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1987년 11월 19일 7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최씨가 자굴산(闍堀山)을 찾아보니 성문의 망대를 뜻하는 자(闍)와 우뚝 솟을 굴(堀)의 뜻을 가진 산으로 높이 897m의 의령군의 진산(鎭山)이라는 기록이 나왔다. 의령은 자굴산의 정기를 받아 지금도 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있다고 했다.

재경의령학우회가 회지의 명칭을 ‘자굴산’이라고 한 것은 서울에 있는 친목회의 회보인 만큼 의령의 지붕이자 고향의 상징인 자굴산의 기상을 살리려는 의미로 보였다.

최씨가 보기에 여러 정황상 호암 이병철 회장과 연관이 있는 책자인 듯했지만 <호암자전>의 여기저기를 훑어보아도 호암이 시를 썼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최씨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책의 목차를 넘기자 목차 뒤에 두 개의 광고가 실려 있었는데, 그중 ‘축 발전 삼성물산주식회사 사장 이병철’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씌어 있었다. 최씨는 흥분했다.

당시 기업인이었던 호암이 광고를 내서 책자 발행에 보탬을 준 것으로 여겨졌다. 책자를 살펴보니 호암의 자작시는 107~108쪽에 ‘海邊에서’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었다. 시를 읽어보니 대번에 당대에 승승장구하던 기업인으로서 호암의 기상이 느껴졌다.


▎자굴산 책자를 경매를 통해 낙찰받은 최현호 씨가 호암의 시를 발견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책자에 ‘삼성물산 사장 이병철’ 광고 수록

최씨는 이 시가 호암의 자작시라고 판단했다. 그는 <자굴산>의 또 다른 소장처가 있는지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국내 여러 주요 대학의 도서관, 여러 고서점과 헌책방, 호암 이병철 회장 관련자료 등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최씨가 발견한 자굴산 책자 이외에는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최씨는 결국 이 시가 이병철 회장이 기고한 유일한 자작시라는 결론을 내리고 발굴 경위와 자신의 시 감상을 곁들여 <월간중앙>에 글을 보내왔다.


▎자굴산 책자의 표지와 목차 뒤에 실린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 명의의 광고.
지난 9월, 기자는 <자굴산> 소장자인 최씨를 만나 책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책자의 발행자는 ‘재경의령학우회’(회장 김종환)로 회칙의 회원자격에는 ‘본적을 의령에 두고 서울시내에 현재 거주하는 자나, 의령에 연고를 가진 자로 서울시내에 거주하며 본회의 가입을 희망하는 자’라고 돼있었다. 책 뒤쪽 향우(선배님) 명부에는 의령이 고향인 향우들의 명단이 실려있었는데, 이름과 직업, 출신면을 적은 란에 ‘이병철. 삼성물산주식회사 사장. 정곡’ 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자굴산 책자에 글을 쓴 필자들은 의령 출신 재경향우와 의령 출신으로 당시 서울지역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글을 기고한 의령 출신 유명인사로는 1955년 결성된 재경의령향우회의 초대회장을 지낸 안호상 초대 문교부장관이 눈에 띄었다. 안호상 씨는 ‘민족과 운명’이라는 제목으로 격정적인 논설을 기고했다.

기자는 이후 서울 마포에 위치한 ‘재경의령향우회’(회장 이종규)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향우회 사무국장으로부터 세월이 너무 지나서인지 재경의령학우회의 정확한 활동내용을 알지 못하며, 관련 당사자들도 대부분 작고했고, <자굴산> 책자를 찾지 못했다는 연락만 돌아왔다.


▎자굴산 책자에 실린 이병철 회장의 자작시인 ‘해변에서’ 원문
경남 의령군청과 의령문화원 등에 같은 내용을 질의했지만 역시 찾지 못했다는 답변이었다. 이후 기자가 여러 자료를 찾아본 결과, 재경의령학우회는 일제 때부터 조직된 의령 출신 재경유학생들의 모임이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기자는 10월, 마지막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필자 란에 호암이라는 필명만 기록돼 있지 이병철이라는 이름 석자가 없는 것이 아무래도 걸렸다.

사실 호암(湖巖)은 이병철 회장의 호이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일제 시대 사학자이자 언론인인 고 문일평 작가의 아호로 더 유명했다.

호암 문일평의 <호암전집>은 당대의 명저로 꼽힌다. 만에 하나 ‘해변에서’가 호암 문일평의 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기자가 여러 자료를 뒤져본 결과 문일평(文一平) 작가는 1888년에 태어나 1939년에 작고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문일평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경남 의령과는 연관이 없었다.

이병철 회장이 사용한 湖巖은 ‘호수마냥 맑은 물을 잔잔하게 가득 채우고, 큰 바위마냥 흔들리지 않는 준엄함’을 뜻한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상공회의소 회장이었던 전용순 씨의 권유로 1955년 11월경부터 호암이라는 호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령출신인 이병철 선대회장이 1958년 재경의령학우회지에 호암이라는 호로 기고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호암재단에 따르면, 생전에 호암이 친필로 ‘湖巖’이라고 쓴 글씨는 많지만 약자로 ‘湖岩’이라고 쓴 경우는 없다고 한다. 따라서 약자로 쓴 것은 <자굴산>이 등사본 책자라서 철필로 써야하기 때문에 시 원본을 건네받은 필경사가 당시 유행하던 약자로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책 목차 뒤에 적혀있는 ‘삼성물산주식회사 사장 이병철’이라는 선명한 광고가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과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이병철 선대회장의 시 ‘해변에서’는 전문이 모두 27행의 현대시다. 이 선대회장이 이 시를 기고한 1958년은 이 회장이 만 48세 때로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삼성물산 등을 창업한 뒤 기업인으로서 승승장구할 때다. 지천명을 앞 둔 나이는 한 개인의 인생에서도 전성기이기도 하다. 호암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병철 선대회장의 개인사뿐 아니라 삼성그룹의 기업사, 그리고 1950년대의 시대상과 분위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홍의장군 곽재우와 벽산 안희제 선생 등을 배출한 의향(義鄕)인 경남 의령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학자이던 집안 어른들의 영향 때문에 5세 때부터 조부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평생 <논어>를 가까이했다. 이 선대회장이 기업을 운영하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논어>를 찬찬히 읽고 거기에서 답을 얻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마을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소년 이병철은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했고, 차분하고 사색적이었다고 한다.

소년 이병철은 11세에 진주에 있는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고, 그 해 외가가 있는 서울 가회동으로 와서 수송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속성과가 있는 중동중학교에 전학한다. 당시 삼청동에서 하숙하며 학교까지 통학했는데, 학교에서도 말수가 없는 평범하고 조용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병철은 중동중학교(지금의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7세 때 박두을 여사와 혼인 후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재학 시절 심한 각기병에 걸려 유학을 중단하고 1934년 귀국했다.

이병철 회장은 기업인으로서 활동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열망이 항상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1982년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병철 선대회장은 어느 연설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경영자가 되기 위해서는 경영이론도 중요하지만 인간을 이해하는 폭을 넓히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학부에서는 사학이나 문학 같은 인문학을 전공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병철 선대회장이 경영자로서도 뛰어났지만 글을 쓰거나 시를 지을만한 소양도 이미 갖추고 있었다는 얘기다. 호암재단에 확인해본 결과 지금까지 이병철 선대회장이 쓴 에세이는 몇 편 있었지만 시 작품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상 ‘해변에서’가 처음인 셈이다.

기업인으로서 이병철 선대회장은 28세 때이던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한 뒤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했다. 1947년 상경해 1948년 삼성물산공사를 창설해 무역업에 뛰어들었고,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부산에서 삼성물산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53년에는 제일제당을, 1954년에는 제일모직을 설립했고, 1957년에는 국내 기업 최초로 사원공채를 실시했다. 이 시를 지은 1958년에는 삼성화재의 전신인 안국화재를 인수하는 등 승승장구하다 1961년에는 기업인으로서 영예인 전경련 초대 회장의 자리에 오른다.




기업인으로서 성취감과 기상 드러나

<자굴산> 5집이 발행된 1958년은 전쟁 후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 미국의 원조에 국가재건을 의존하고 있을 때였고, 기업인들이 너도나도 국가 재건의 열의에 불타 있을 때다.

이병철 선대회장의 자서전인 <호암자전>과 <호암 경영철학> 등에 따르면, 이병철 선대회장은 당시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이 성공적인 경영으로 경제적 기반을 다져, 우리나라가 자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한국경제재건 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이 회장은 한국 경제의 앞날을 놓고 정치·경제·학계의 중진들과 서로 진지한 의견을 나누었고,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활동도 활발했다.

최현호 씨는 이번에 발굴된 <자굴산>뿐만 아니라 함께 고문서 경매장에서 낙찰받은 시사잡지 <세계신문>1호(1956년 간)에도 ‘제일제당공업 주식회사·제일모직공업주식회사·삼성물산주식회사 취체역 사장 이병철’이라는 이름으로 표지광고를 낸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병철 회장이 기업인으로서 무한히 성장하고 있었을 때인 만큼 이 시에서는 이 회장의 진취적인 기상이 잘 드러난다.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최현호 씨는 해변에서라는 시에 대해 “이병철 회장이 어느 날 바다가 바라보이는 해변에서 바람에 의해 모래와 같이 밀려오는 큰 파도를 바라보며 세상을 바다와 같이, 기업행위를 파도와 같이 비유하며 해변에서 맞는 피부의 감촉을 시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그는 1~4행의 “오... 훨훨 춤추며 올라가는 모래/ 오... 빛을 모아 천지간(天地間)을 메꾸고/ 저것은 파도 모래/ 인간의 피부다”를 두고는 “인간의 기준으로 바라보았을 때 지극히 작은 모래, 그 작은 물체가 지혜의 빛을 모아 하늘과 땅 사이를 메꾸어가는 무한한 성장을 보고 파도모래라고 표현한다. 인간 개개인의 미미한 힘과 가치가 파도와 같이 서로 얽혀, 역동적인 가치를 창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고 해석했다.

최씨는 “빛과 그림자가 요동하는/ 그속에 -/ 그렇다/ 나의 피부가 들어 있다/ 손을 흔들며/ 다리를 구부리며/떠들며 노래하면 /그 속에 나의 피부가 들어 있다” 부분도 “기업인으로서 이 선대회장이 이룩한 모든 것 속에는 이 회장의 모든 노력과 정성, 혼과 열정이 스며있다는 것을 ‘나의 피부가 들어 있다’고 독백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19~21행의 “「야 - 나다」 하고/ 불러보고 싶은 충동/ 늑골(肋骨)과 같이 쭉 뻗은/ 솔숲에 걸려/ 옴으러지다 부프러 오르는 나의 마음”은 “이 회장이 기업을 통해 이룩한 성취감으로 ‘야- 나다’하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도 있지만 어떤 때는 어려운 난관들로 몸이 움츠려들기도 하다가 다시 부풀어 오르듯 성취감을 느끼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했다. 시 게재 시기가 4·19를 앞둔 1958년으로 자유당 말기임을 감안하면 기업인으로서 정치적·경제적 난관을 함축하는 의미가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최현호 씨는 “전문적인 시인이 아닌 최고경영자의 시이지만 회사를 창업하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어려운 시기에 풍랑과 같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큰 기업으로 부흥시키면서 무한히 성장하게 한 기업인의 감응이 잘 나타나 있다”며 “경영인으로서 시를 기고한 것만 보아도 이병철 회장의 인문학에 대한 면면을 알 수가 있고, 내면에 흐르는 문학적인 감각과 경영인으로서의 정열적인 감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라고 말했다. 기업인으로 열심히 자립경제와 국가재건에 노력하다가 어느 날 짬을 내 해변의 파도를 보면서 되살아난 이병철 선대회장의 감성이 잘 드러나 있다는 설명이다.


▎경남 의령의 이병철 선대회장의 생가에는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발굴자 최씨 “기념관에 기증하겠다”

기자가 보기에도 호암의 시 ‘해변에서’는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이 대기업 총수로서 시련과 역경을 견디어 내며 무한히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느낀 성취감과 기상, 그리고 고뇌에 대한 감상이 잘 묻어있는 시로 보였다.

현재 호암 이병철 생가가 자리한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장내마을은 자굴산 산줄기의 끝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곳으로 2007년 생가가 개방된 이후 매일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의령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최씨는 자신이 발굴해 소장하고 있는 <자굴산> 5집도 경남 의령군이 설립계획을 갖고 있는 ‘호암기념관’에 기증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쳤다.

11월 19일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 26주기를 앞둔 가운데 이번에 발견된 이병철 선대회장의 자작시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병철 선대회장의 문학적 감수성이 잘 드러나 있는데다 기업인의 기상과 감성을 담은 시로서 기업인과 경영인들에게 널리 회자될 것으로 기대된다.

201311호 (20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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