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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VS 전두환·노태우 16년 추징금 환수전쟁 

 

검찰 환수팀, 국민여론 등에 업고 전두환 일가에 ‘판정승’…전씨 일가 은닉재산 수두룩, 성강미술관 땅값만 40억원대

▎검찰청 앞에 출두해 전 전 대통령 일가를 대표해 대국민 사과하는 전재국 씨.



‘살아있는 권력’ 앞에 ‘왕년의 권력’은 무력했다. “통장에 29만원밖에 없다”며 16년 동안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텨온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결국 검찰의 전방위 압박수사에 백기를 들었다. 검찰과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가 16년간 벌여온 추징금 환수전쟁을 총정리했다.

지난 9월 10일, ‘전두환 일가 미납추징금 환수전담팀’(팀장 김형준 부장검사)에 출두하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두한 전재국(54) 씨는 침통한 표정이었다. 출판계를 주름잡는 ‘시공사’ 회장이자 ‘은둔형 경영자’로 알려진 그는 검찰의 포토라인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색한 듯 한순간 침묵했다.


▎1995년 골목성명을 발표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검찰에 저항했다.
추징금 미납으로 ‘국민 밉상’으로 전락한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를 대표해 기자회견장에 나온 그는 요란한 카메라 셔터 소리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은 듯 멈칫했다. 재국 씨의 굳은 표정 뒤로 18년 전, 전두환(82) 전 대통령의 고집스러운 모습이 오버랩됐다.

“저는 검찰의 소환 요구 및 여타의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1995년 12월, 전두환 전 대통령은 서울 연희동 사저 앞 골목에서 기습 성명을 발표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골목 성명’을 발표한 그는 검찰 수사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토로하고는 측근들과 함께 고향 합천으로 향했다.

당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전 전 대통령에게서는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한 반성이나 국민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8년이 지나 검찰청사 앞에 선 전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 씨는 검찰의 칼날 앞에 바짝 움츠리는 일반 소시민과 다를 바 없었다. 세월 앞에서 권력은 무상했다.

재국 씨는 미리 준비한 ‘국민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라는 제목의 발표문을 읽어나갔다. 그는 “그간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저희 가족 모두를 대표해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고 고개를 숙인 뒤 “부모님이 살고 있는 연희동 자택을 포함해 미납 추징금 1672억원을 모두 자진 납부하겠다”고 밝혔다.

재국 씨는 우선 추징금 납부를 위해 검찰이 압류한 연희동 사저 정원과 경기도 오산 땅, 경기도 연천 허브빌리지 등 전씨 일가의 부동산과 압류된 미술품 등에 대한 재산권을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이들 재산의 가치는 800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족한 추징금액은 전 전 대통령 부부와 자녀들이 분담해 내겠다고 했다.

전 전 대통령 부부는 이순자 씨 명의의 연희동 사저 본채를 자진 납부하기로 했다. 재국 씨 자신은 검찰이 압류하지 않은 개인소장 고가 미술품과 서울 서초동 시공사 사옥 3필지, 자신이 대표로 있는 출판유통업체인 북플러스 주식과 경남 합천군 소재 선산(21만 평)을 내놓겠다고 했다.

차남 재용(49) 씨는 서초동 시공사 사옥 1필지와 경기도 오산 일대 토지를, 3남 재만(42) 씨는 서울 한남동 신원플라자 빌딩과 부인 명의의 연희동 사저 별채를 포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재만 씨의 장인인 동아원그룹의 이희상(68) 회장도 275억원 상당의 금융자산을 나누어 낼 것이라고 했다. 딸 효선(51) 씨는 경기 안양시 관양동 부지(시가 40억원)를 포기해 추징금에 보탤 것이라고 했다.

금액으로 따지면, 재국 씨가 700억원, 재용 씨가 500억원, 재만 씨가 200억원, 효선 씨가 40억원 상당이다. 이날 전 전 대통령 일가가 검찰에 납부하기로 한 부동산과 동산, 금융자산은 모두 1703억원 상당으로 표면적으로는 미납 추징금 1672억원을 웃돈다. 지난 5월 추징금 환수팀을 꾸린 뒤 숨겨진 재산을 추적하며 숨쉴 틈 없이 몰아친 비자금 환수팀의 ‘판정승’이었다.

1997년은 검찰의 판정패

이날 재국 씨의 발표를 지켜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진 사람이 바로 최환(70) 변호사다. 그는 1995년 당시 서울지검장으로 전두환·노태우 내란죄와 뇌물죄 수사를 총지휘했다. 하지만 당시는 검찰의 판정패였다. 전 전 대통령은 골목성명을 발표하며 검찰에 공개적으로 항거했다. 당시 비자금 수사팀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90년대 초반 4200~4800개의 차명계좌를 통해 최소 2000억원 이상의 비자금을 운용했던 사실을 찾아내고도 인력과 시간의 한계로 뜻을 접어야 했다.

최 변호사는 전 전 대통령 일가의 추징금 완납 발표와 관련해 “국민들의 압력과 검찰의 수사 압박이 본인과 가족들의 심경변화에 큰 영향을 준 것 같다”며 “법치주의가 살아나고 우리 사회의 정의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다고 보여 대단히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검찰과 전두환 일가의 추징금 환수 16년 역사는 밀고 당기는 심리전의 연속이었다. 1997년 4월, 전두환 전 대통령은 내란·반란·뇌물수수죄로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고, 기업 총수들로부터 받은 돈 가운데 뇌물로 인정된 2205억원이 추징금으로 정해졌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9600만원이 선고됐다. 두 사람은 그해 12월 특별사면 됐다.

특별사면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추징금 완납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노 전 대통령이 비자금을 맡겨 놓은 곳이라고 지목하면 국가가 이를 근거로 강제 추징해 국고로 귀속시켰다. 그런 추징금이 97회에 걸쳐 무려 2397억원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올해 초까지 230억원 남짓 정도의 추징금만 남겨두고 있었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은 달랐다. 1997년 확정 판결 당시 예금 107억원과 각종 채권 등 312억9000만원이 추징된 뒤로는 추징금 납부에 전혀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검찰도 소극적이었다. ‘전두환 추징법’이 시행된 지난 7월까지 3년마다 돌아오는 시효 만기를 연장하는 데 급급했다.

이후 검찰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경전이 여러 차례 벌어졌다. 검찰은 2000년 5월 전 전 대통령의 1987년식 벤츠 승용차와 재국 씨 명의의 콘도회원권을 강제집행해 추징금 시효를 3년 더 늘렸다. 검찰은 두 번째 시효 만기가 돌아온 2003년, 전 전 대통령의 경호동으로 쓰이던 연희동 자택의 별채를 경매에 부쳤다. 그러자 전 전 대통령 일가의 재산관리인인 처남 이창석(62) 씨가 기다렸다는 듯 별채를 16억4800만원에 낙찰받았다. 당시만 해도 전 전 대통령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검찰이 장군 하면 멍군 하고 받아치는 격이었다.

화가 난 검찰은 같은 해 전씨의 세간을 경매에 부쳤다. 전 전 대통령은 텔레비전과 냉장고·골프채·찻잔 등 살림살이뿐만 아니라 기르던 진돗개 두 마리까지 경매에 넘어가는 수모를 당했다. 당시 경매에 나온 물건들은 전 전 대통령이 직접 적어서 법원에 냈는데 이 무렵 전 전 대통령 자신이 예금자산이 29만원이라고 기재했다. 이로 인해 “전 재산 29만원”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어야 했다.

2004년, 검찰은 봉인된 채 보관 중이던 1995년 당시의 비자금 수사 자료를 다시 꺼냈다. 차남 재용 씨에게 167억원의 비자금이 흘러 들어간 것이 파악돼 재용 씨가 구속됐다. 불법 비자금을 추적하던 검찰은 서울 명동의 한 사채업자 계좌에 입금된 수표의 출처를 따라가다 노숙자 명의의 차명계좌를 발견했다.

계좌추적 결과 이 차명계좌의 돈이 1995년 검찰이 수사한 전두환 비자금의 차명계좌에서 나온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이 전 전 대통령으로부터 73억5500만원을 추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추징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대신 전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74) 씨가 자신이 관리하던 130억원과 친인척에게 모은 70억원을 합해 200억원의 추징금을 ‘대납’해 위기를 넘겼다. 전 전 대통령은 2010년 10월에는 “강연으로 소득이 발생했다”며 300만원을 자진 납부했다. 첫 자진납부였다. 그러나 8개월 앞으로 다가온 시한 만료를 앞두고 강제집행을 피하려는 꼼수라는 비난만 받았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검찰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검찰 수뇌부는 전두환·노태우 추징금 환수를 주요 과제로 내걸었다. 전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에 대한 시효가 올해 10월로 만료되는 점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성추문 사건과 뇌물 수수 사건 등으로 땅에 떨어진 검찰의 이미지를 끌어올리려는 포석이기도 했다.




채동욱과 전두환의 악연

이 대목에서 서초동 검찰청 주변에서 회자되는 것이 채동욱 검찰총장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18년 악연이다. 두 사람은 전씨가 군형법상 반란·내란 및 뇌물 등 혐의로 수사를 받던 1995년 말 처음 만났다.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의 채동욱 검사는 ‘12·12, 5·18사건 특별수사본부’에 차출돼 전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 집행과 피의자 심문, 공소유지 업무를 맡았다.

이듬해 5월 열린 공판에서 채 검사는 A4용지 50쪽 분량의 논고 초안을 직접 작성해 전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자신에게 사형을 구형한 인물을 전씨가 잊을 리 없다. 채 검사 역시 전 전 대통령을 잊지 않았다. 지난 5월 24일, 채 검찰총장의 특별지시로 서울중앙지검에 전두환 일가 미납추징금 환수 전담팀이 꾸려졌다. 김민형 검사를 팀장으로 해 자금추적 전문 수사관 7명이 팀에 합류했다.

외부 환경도 검찰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6월 3일 독립언론 ‘뉴스타파’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가 공동으로 전재국 씨의 해외 재산도피 의혹을 제기하자 국민감정이 들끓었다. 재국 씨가 조세 회피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2004년 7월 페이퍼컴퍼니 ‘블루 아도니스 코포레이션’을 설립했고, 싱가포르를 방문해 직접 해외 비밀계좌를 설립한 것으로 드러난 것. 국민의 비난 여론을 등에 업은 검찰 수사도 한층 속도를 냈다.

언론과 정치권도 검찰을 도왔다. 6월 27일에는 공무원의 불법취득 재산의 추징시효를 늘리고 제3자로까지 추징대상을 확대하는 내용을 담은 ‘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일명 전두환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개정안은 공무원의 불법재산에 대한 몰수·추징시효를 현행 3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고, 추징 범위를 본인뿐 아니라 가족 등 제3자로 확대하고 있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추징금 환수를 추진하는 검찰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됐다.

칼을 빼들 채비를 갖춘 검찰은 ‘전두환법’ 시행일(7월 12일)을 계기로 기습 공격에 나섰다. 7월 16일, 비자금 환수팀과 서울중앙지검 외사부는 전 전 대통령의 연희동 사저와 시공사, 비엘에셋 등 전두환 일가의 자택 및 관련 회사 사무실 등 18곳을 압수수색했다. 골동품과 회화 등 미술품 수백여 점이 압수되는 장면이 TV를 통해 중계되자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는 국민의 여론을 등에 업고 추징금 환수에 속도를 내려는 노련한 검찰의 노림수였다. 검찰은 다음날 전 전 대통령의 친인척 자택 등 13곳을 추가 압수수색하며 거침없이 칼을 휘둘렀다. 전 전 대통령과 친인척들은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집안이 수색당하는 현장을 지켜보아야 했다.

7월 18일, 환수전담팀이 28명으로 증원되면서 검찰 환수팀의 수사 속도는 더 빨라졌다. 검찰은 이순자 씨 명의로 된 30억원대 개인연금 보험을 압류하는가 하면 시중은행을 뒤져 전두환 일가의 대여금고 7개를 찾아냈다. 검찰이 노후를 위해 묻어둔 30억원짜리 개인연금 보험까지 압류하자 전 전 대통령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라고 강하게 저항했지만 반향은 약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때만 해도 전 대통령 일가는 상황파악을 못했다고 한다.

7월 25일 전재국 씨는 재용 씨·효선 씨 등과 함께 법률적 대응을 위해 한 법조계 인사와 만난 자리에서 “(추징금으로) 낼 돈이 없다. 파산신청을 해야 할 형편이다. 아버지는 약간의 기억상실 증세와 치매기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재국 씨는 “한둘 구속되는 것은 감수할 수 있다”며 자신의 사법처리도 각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8월 5일, 검찰 수뇌부는 비자금 환수팀에 10월까지 성과를 내라며 45명으로 인력을 증원해주었고, 김형준 서울중앙지검 외사부장에게 팀장을 맡겼다. 검찰이 비자금 환수 문제에 대해 끝장을 보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해석됐다. 수사팀은 전 전 대통령의 자녀별로 팀을 나눠 이들의 숨겨진 재산을 경쟁적으로 추적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검찰의 촉수가 뻗어 오자 전두환 전 대통령 측도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듯 반격을 해왔다. 8월 6일, 전두환 전 대통령을 17년 동안 보좌해온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은 언론에 ‘보도 참고 자료’까지 배포하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재산이 많았다. 불법 정치자금은 없다”며 저항했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 일가의 언론플레이에 국민은 싸늘한 반응만 보였다.


8월 12일, 검찰은 비자금 수사의 핵심으로 바로 파고들어갔다. 전두환 일가의 재산관리인인 전 전 대통령의 처남 이창석 씨를 소환한 것. 이날을 계기로 비자금 환수팀도 수사팀으로 전환됐다. 검찰의 15시간에 걸친 강도 높은 조사에 이씨가 손을 들었다. 전 전 대통령을 매형으로 둔 죄로 13차례나 검찰에 불려간 이씨는 재용 씨에게 경기도 오산 땅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124억원대 세금을 포탈한 혐의를 순순히 인정했다.

전두환 측 언론플레이에 국민 ‘싸늘’

그러자 전 전 대통령 쪽이 바빠졌다. 전 전 대통령 측 정주교 변호사는 8월 14일 오후 수사팀을 찾아 추징금의 일부라도 납부하겠다는 뜻을 전달하며 검찰의 기류를 살폈다. 검찰은 단호했다.

8월 16일 검찰은 “전 전 대통령 측과 추징금 자진납부 규모를 두고 협상할 상황이 아니다. 미납 추징금 전액 환수를 목표로 하고 있다”며 협상 불가방침을 밝혔다.

검찰은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8월 19일 이창석 씨를 구속한 뒤 재용 씨 소유의 경기도 오산 땅을 바로 압류했다. 재용 씨의 미국 내 부동산을 관리한 장모 윤모 씨와 처제 박모 씨도 검찰에 불러들여 전재용 씨를 압박해 들어갔다.

검찰은 동시에 또 다른 비자금 관리인인 전 전 대통령 조카 이재홍 씨를 체포했다. 이씨 명의로 된 서울 한남동 땅을 압류하고, 이씨의 금융계좌도 압류해 전 전 대통령 일가의 돈줄을 죄기 시작했다. 검찰의 속도전에 전 전 대통령 일가의 불면의 밤이 깊어졌다.

검찰은 숨 쉴 틈 없이 전두환 일가를 몰아붙였다. 8월 26일, 전 전 대통령의 서울 연희동 사저 부지 중 정원 땅을 압류했고, 8월 30일에는 장남 재국 씨가 운영하는 경기도 연천의 ‘허브빌리지’ 땅 33필지, 13만여㎡를 압류했다. 전 전 대통령의 자녀들은 미납 추징금 납부를 놓고 긴급 가족회의에 들어갔다. 전 전 대통령은 자녀들에게 미납 추징금 납부를 요청했고, 이순자 여사는 연희동 자택도 포기할 의사도 내비쳤다.

재국 씨와 재용 씨는 추징금 납부 문제를 놓고 온도 차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2004년에 이어 다시 구속될 위기에 처한 재용 씨는 추징금 납부에 적극적이었지만 사업체가 많은 재국 씨는 자신의 재산축적이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보다 경영성과로 이룬 것이 많다는 이유로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전 전 대통령의 딸 전효선 서경대 교수가 학교에 휴직계를 제출한 사실이 알려진 것도 이 무렵이다.

검찰은 공격의 고삐를 더 바짝 조였다. 8월 31일에는 재용씨 부인인 박상아 씨를 소환했다. 왕년의 스타 배우인 박상아 씨는 검찰에 불려가 15시간 동안 조사를 받는 굴욕을 당했다. 검찰은 9월 2일에는 전 전 대통령의 3남 재만 씨의 장인이 운영하는 동아원 그룹을 압수수색했다. 여차하면 동아원 그룹이 미국에서 운영하는 나파밸리 와인농장까지 문제삼겠다는 메시지였다.

세 아들이 줄줄이 수사선상에 오르면서 전 전 대통령 부부는 매일 밤 전전반측한 것으로 알려진다. 가족회의가 열렸지만 이때까지도 추징금 납부에 대한 가족 간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 정주교 변호사를 통해 “당장 1672억원에 달하는 거액을 마련할 능력이 없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1 9월 10일 검찰에 출두한 전재국 씨. 침통한 표정이다. 2 검찰은 한번 구속된 경험이 있는 전재용 씨를 강도 높게 수사해 추징금 완납을 이끌어냈다.




노태우 추징금 완납이 결정타

여차하면 재용 씨를 구속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검찰은 9월 3일, 차남 재용 씨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해 18시간 동안 조사했다. 재용 씨는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기자들에게 “미납 추징금 자진납부 방법을 논의 중이다. 최소 1000억원은 내야 국민들이 공감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재용 씨의 검찰소환 이후 전두환 일가는 검찰이 압류한 재산을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9월 4일, 와병 중인 노태우(81)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230억원 완납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결정타가 됐다. 노 전 대통령 측은 그동안 친동생 재우 씨와 옛 사돈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에게 20여 년 전 맡겨 놓았던 120억원과 230억원의 비자금을 되찾아 추징금을 완납하겠다는 입장이었는데, 동생과 사돈이 응하지 않아 소송을 벌여왔다.

결국 9월 2일 노씨의 전 사돈인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이 80억원을 대납한 데 이어 9월 4일에 동생 재우 씨가 150억4300만원을 대납함으로써 노 전 대통령은 추징금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노 전 대통령 측은 추징금 완납과 관련해 “전직 대통령과 장군으로서 명예를 회복하고 오명을 남기지 않게 됐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 전 대통령의 추징금 완납 소식은 육사 시절부터 친구인 노태우 전 대통령을 늘 앞섰다고 믿고 있는 전 전 대통령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9월 5일, 재용 씨가 검찰에 재출석해 검찰과 추징금 납부와 관련한 조율에 들어갔다. 검찰은 압류된 부동산 등을 매각하겠다는 전 전 대통령 일가의 자진 납부 의사는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공매한 뒤 평가 가치가 시세보다 크게 떨어져 환수 금액이 적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때문에 납부금액을 더 올려 낼 것을 요구했다.

전 전 대통령 자녀들은 9월 4일부터 서울 평창동 재국 씨의 집에 모여 각자 분담금을 어떻게 나누고, 분담금 마련은 어떻게 할지 등 세부적인 실행 계획들을 논의했다. 이순자 씨는 “이렇게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 여기 살아서 뭐하겠느냐”며 낙향할 뜻을 밝혔지만 자녀들이 말렸다고 한다.

전 전 대통령 일가의 답변이 늦어지자 검찰은 9월 6일, 이창석 씨를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 기소해 압박을 강화했다. 이날 재용 씨는 조세포탈 공모 혐의자에서 제외됐지만 재용 씨에 대한 사법처리는 언제든 가능한 상황이었다. 전씨 일가는 다시 가족회의를 열어 구체적인 분담액을 논의했다.

8개월간 수감 생활 경험이 있는 재용 씨가 비자금 전액 납부에 소극적이던 재국 씨를 설득했다. 마침내 앞서 재국 씨가 발표한 내용으로 가족들 간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16년간에 걸친 비자금 환수 드라마는 제 1막을 고했다. 전담팀이 꾸려진 지 109일 만이자 전두환 일가에 대한 대대적입 압수수색 이후 56일 만의 쾌거였다.

하지만 구체적인 환수절차는 아직 산 넘어 산이다. 검찰이 확보한 1703억원의 책임재산 중 부동산이 1200억원이나 된다. 공매를 통한 처분은 시세의 70~80% 금액에 낙찰되기때문에 검찰이 확보할 수 있는 추징금액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재산적 가치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 오산 땅은 15만 평으로 덩치가 커서 한번에 낙찰받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도 미지수다.

낙찰자가 계속 나타나지 않을 경우 현금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땅을 분할한다면 부동산의 가치만 더욱 떨어질 수 있다. 부동산 공매에 따라 전 전 대통령 일가에게 부과될 양도세·증여세 등 세금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검찰은 전두환 일가를 살살 달래가면서 추징금 전액을 납부하도록 해야 할 상황이다.


▎<월간중앙>이 찾아낸 전두환 일가의 숨은 재산인 헤이리 성강미술관 건물.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돼 있다.
은닉된 성강미술관 땅값만 40억원 대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가 미납 추징금 전액을 납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국민 여론은 여전히 싸늘하다. 추징금 자진납부 결정에 전 전 대통령 일가의 ‘꼼수’가 있다는 관측도 있다. 무기명 채권 등 숨겨진 금융자산을 검찰이 찾지 못하도록 잘 팔리지 않는 부동산 위주로 재산을 내놓아 시간 벌기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현금 자산이 아닌 부동산을 통한 자진납부는 근원적인 추징금 완납 대책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전 전 대통령 일가는 추징금을 다 낸다 해도 여전히 상당한 부자다. 전 전 대통령은 검찰이 압류한 이순자 씨 명의의 30억원짜리 연금보험과 재용 씨가 거주하는 이태원 빌라 1채는 자진 납부 목록에서 제외했다. 이 대목에서 검찰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다양한 수법으로 은닉된 전두환 일가의 재산이다. 최근 <월간중앙>이 찾아낸 성강문화재단 소유의 성강미술관 부지도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마을 ‘하늘마당’ 인근에 위치한 성강미술관은 현재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돼 있다.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29·30·31·32번지에 위치한 1145평 규모의 이 땅은 2008~2009년 (유)윤진종합건설이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도용박물관’으로 신축하다 중단됐다.

성강문화재단은 이창석 씨가 이사장, 전재국 씨와 전씨의 측근들이 이사로 등재돼 있다. 성강문화재단 소유로 되어있지만 사실상 전재국 씨 소유나 마찬가지다. 이 미술관 부지에서 불과 100m도 안되는 거리에 재국 씨 소유의 아티누스 갤러리가 자리 잡고 있다. 아티누스는 재국 씨가 추징금 납부 계획서에서 제외해놓은 부동산이다.

인근 부동산 업소에 따르면 헤이리 예술인마을 토지는 1평당 350만~400만원 수준에 거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1145평이면 어림잡아 땅값만 40억~45억원으로 건물가를 포함하면 50억원에 이른다.

여론조사기관인 ‘한국갤럽’이 지난 9월 9~10일 양일간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604명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68%가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검찰의 은닉 재산 수사는 계속해야 한다”고 답했다. 전두환·노태우 추징금 환수에 적극적이었던 채동욱 검찰총장의 수난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해 전 전 대통령 일가의 탈법행위에 대한 수사를 계속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201310호 (201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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