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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REPRENEURS | JVM VICE CHAIRMAN KIM, JUN-HO 

‘약 포장’의 역사를 바꾼 사나이 

사진 공정식 객원 기자
늘상 ‘위기’란 단어가 따라다녔다. 성공의 과정이 으레 그렇다지만 유독 심한 편이었다. 집안이 가난해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돈을 벌었다. 이후 창업에 성공하자 폐암 선고를 받았고, 건강을 회복해 기업을 일으키자마자 특허소송이 잇따랐다. 승소 후에는 키코사태가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연 매출 800억원이 넘는 중견기업이 된 지금도 늘 긴장한다. 제이브이엠(JVM)의 김준호 부회장 이야기다.

▎“약 포장을 쉽게할 수 없을까” 하며 시작된 소년의 고민은 오늘날 JVM을 만들었다. 시련으로 개발한 약 포장기라 김준호 부회장의 애정이 남다르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성공 비결을 묻자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대개의 성공한 CEO들이 술술 답하는 질문인데도 말이다. 지난 6월 13일 오후 대구 본사에서 제이브이엠(JVM) 창업자 김준호(66) 부회장을 만났다. JVM은 의약품을 자동 조제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회사다.

연 매출 800억원, 국내 시장 점유율은 90%에 달한다. 북미시장 점유율은 74%, 유럽시장은 78%로 이 분야에서 세계 선두를 달린다. 김 부회장은 1000억원대 자산가로 코스닥 부호 30위에 올라 있다. 누구나 성공했다 말할 법한 그가 ‘성공’이란 말에 고개를 저으니 그 이유가 궁금했다.

“죽을 힘을 다해 산의 정상에 올라도 굴러 떨어지는 건 순식간입니다. 1등은 언제든 꼴찌가 될 수 있습니다. 삶이 이렇듯 불확실한데 성공이란 말을 쉽게 쓸 수 없지요. 그래서 늘 긴장합니다.”

김 부회장이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의 삶은 위기의 연속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원래 가난했던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소년이 생계를 위해 생각해 낸 것이 약 배달이었다. 동네 약국에서 주문 받은 약을 약 도매상에서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감을 따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은 체구의 어린 중학생을 누가 믿고 맡기겠습니까. 주문 받기는커녕 약국 주인이 말을 걸지도 않았습니다. 그때는 약국 주인이 왜 그렇게 커보이고 다가가기 힘들던지…”

약 포장기 사업 잘나가다 ‘폐암’선고

오랜 고민 끝에 묘안을 냈다. 집에 있는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동네 약국을 돌아다녔다. 새벽 5시에 약국 앞에서 기다리다 문을 열면 곳곳을 쓸고 닦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약국 주인들이 착하다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약 주문도 들어왔다. 신이 난 김 부회장은 약국 조제실로 들어가 약 포장을 도왔다. “일일이 손으로 포장하는 일이 힘들더군요. 이걸 좀 더 쉽게 할 수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약 포장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김 부회장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1977년 협신의료기(JVM의 전신)를 창업했다. 3년 동안 서울 청계천을 다니며 기계를 배우고, 여러 대학을 돌며 연구한 끝에 수동 약포장기를 개발했다. 기계 위에 비닐을 깔고 약을 놓은 뒤에 다시 비닐을 덮고 누르면 20여 개씩 포장이 됐다. 처음 보는 약 포장 기계에 약국의 반응이 좋았다. 김 부회장은 “자동차가 없어 22㎏의 약포장기를 직접 들고 영업하러 다녔다”고 했다. “버스기사가 비좁다며 승차를 거부하기도 했죠. 기계 설치와 수리를 전부 도맡아야 했습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때마침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되면서 병원에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환자가 늘어 수동 포장보다 작업 속도가 2배 빠른 약 포장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약 포장기를 한 달에 2~3대 밖에 생산할 수 없어 고객이 줄을 설 정도였다. 수익이 늘자 JVM은 수동에 이어 반자동 포장기를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1988년 잘 달리던 회사에 급제동에 걸렸다. 김 부회장이 폐암 선고를 받았다. 그는 회사를 전문경영인에 맡기고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8년을 보냈다. 치료 경과는 좋았지만 회사가 받은 타격은 컸다. 70여명이던 직원 중에서 7명만이 남았다. 몇몇 직원은 퇴사해 JVM의 기술로 창업하기도 했다.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세운 회사가 JVM의 경쟁상대가 돼 있었습니다. 죽을만큼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김 부회장은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명약은 경쟁력 있는 신기술이었다.

김 부회장은 전자동 정제 분류 및 포장 시스템(ATDPS)을 개발해 재기했다. 반자동방식의 시스템을 발전시킨 모델이다. 그는 사재 20억원을 투자해 3년 동안 개발에 몰두했다. 처방전을 입력하면 무인으로 모든 약을 분류·분배·포장할 뿐 아니라 약 포장지에 투약정보까지 자동으로 인쇄된다. ATDPS 제조기술은 JVM과 일본 3개 사만이 보유하고 있다.

JVM이 ATDPS를 앞세워 국내시장을 빠르게 점유하자 위협을 느낀 일본 경쟁사들은 2000년부터 특허소송을 걸어왔다. JVM이 자사 기술을 침해했다는 주장이었다. 3년 동안 승·패소를 거듭한 끝에 53건의 끈질긴 소송을 모두 끝낸 김 부회장은 비로소 특허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것 만큼 그에 대한 권리도 중요하다는 값비싼 교훈을 얻었습니다.”


▎JVM 내부의 ‘특허의 벽’. 특허장으로 벽면을 가득 채웠다. 특허소송으로 지적재산권에 대한 교훈을 얻은 결과다.
JVM에는 ‘특허의 벽’이 있다. 특허장으로 가득 메운 벽면을 말한다. 특허 침해소송 이후 김 부회장이 특허 전문가를 고용하는 등 전담부서를 만들어 특허 보유에 집중한 결과다. 지금까지 획득한 특허가 386건, 심사가 진행 중인 특허가 370건이다.

글로벌 유통기업과 파트너십 맺고 도약

특허를 무기로 김 부회장은 북미 시장 공략에 나섰다. 하지만 북미 시장엔 유야마, 산요 등 먼저 진출한 일본 기업이 버티고 있어 진입이 쉽지 않았다. JVM은 일본 업체의 파트너보다 영향력이 큰 파트너가 필요했다. 글로벌 의료 유통전문업체 매케슨(McKesson)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매케슨은 포브스가 올해 선정한 ‘글로벌 2000대 기업’에서 224위를 차지했다).

매케슨과 파트너십을 맺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지만 김 부회장은 실무자조차 만날 수가 없었다. 1년 8개월을 끈질지게 문을 두드린 끝에 계약이 성사됐다. 그는 “제품에 ‘JVM’이 꼭 들어가야 한다”며 고집했다. 거대 기업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자사 브랜드가 필요하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매케슨과 파트너십을 맺은 JVM은 미국·유럽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탄탄대로였던 수출 길은 JVM에 악재로 다가왔다. 수출 비중이 60% 가까이 높아지자 JVM은 여느 기업처럼 키코(환 헤지 파생상품)에 가입했다. 하지만 은행 예상과 달리 환율이 뛰면서 2009년 키코사태가 발생했다. 1080억원의 환손실이 생기면서 부채 비율이 5700%까지 올랐다. 설상가상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맞으면서 수출도 급감했다. 일본 경쟁사들은 이때다 싶어 악성루머를 퍼뜨리고 특허소송을 무차별로 걸었다.

김 부회장은 연구개발(R&D)에 집중하며 돌파구를 찾았다. 투자비중을 매출의 3~5%에서 12%로 높였다. 또 약국에서 판매하는 모든 입·출고를 바코드를 통해 관리하는 ‘전자동 약품 관리 시스템’을 출시했다. 공격적인 신제품 개발이 매출에 반영되면서 영업이익이 늘기 시작했다. 김 부회장은 “빚더미에 눌려도 투자를 늘린 것이 ‘신의 한 수’였다”고 말했다.

여러 차례 위기를 이겨낸 저력을 묻자 김 부회장은 중학생 시절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약을 배달하려면 자전거가 필요한데 그걸 살 돈이 없었어요. 어머니가 일수로 빚을 내 고물 자전거를 장만했습니다. 매일 저녁 빚쟁이가 찾아왔어요. 험한 소리 못 듣게 하려고 어머니는 어린 저를 방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빚쟁이 말을 모두 들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우리 아들이 잘해낼 겁니다’라며 빚쟁이에게 말할 때마다 억장이 무너져 울었습니다.” 두려움과 비관으로 밤을 새던 날들은 수많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성공’이란 말에 손사래를 치던 이유를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201407호 (201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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