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Affairs

Home>>World Affairs

혐오 발언 둘러싼 일본의 고민 

법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 나오지만 아직은 신중론이 우세하다 

[ 필자 다케다 하지무(일본)는 아사히신문 기자다.]

오사카에 거주하는 이신혜(43) 씨는 경상북도 출신 아버지와 재일한국인 2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 한국인 2.5세다. 프리랜서 작가로 일한다. 일본인 남편과 결혼해 중학생 아들을 하나 두고 있다. 낮은 원고료, 반항기에 접어든 아들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근심 없이 행복했다.

그런 삶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건 지난해 초였다. “뻔뻔스런 조선인” “당장 조선으로 돌아가라” 등 이 씨의 출신을 비방하는 글이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하루에 수십 건에서 수백 건씩 쏟아졌다. 지난해 초 도쿄 신오쿠보에서 “조선인은 떠나라” “죽여라” 등을 연호하는 ‘재일한국인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들의 모임’(재특회)의 시위를 취재한 뒤 비판적인 기사를 쓴 것이 화근이었다. 사쿠라이 마코토 재특회 회장이 인터넷에서 이 씨를 지목해 모욕을 가하자 이에 동조하는 인터넷 이용자들도 이 씨에게 혐오 발언을 퍼부었다.

이 씨는 8월 18일 인터넷상에서 인종차별적인 발언으로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사쿠라이와 재특회에 약 550만 엔, 또 그 발언을 게재한 웹사이트 운영자에 약 2200만 엔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재일한국인을 향한 혐오 발언과 관련해 개인이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대해 사쿠라이는 “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한국 언론부터 돌이켜보라”며 “인터넷상의 엉터리 기사에 대해 맞고소하겠다”고 맞받았다.

일본사회가 혐오 발언을 방치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10월 교토지방법원은 재특회 등이 교토 조선인 초등학교에서 벌인 가두선전을 ‘인종차별’이라고 최초로 인정한 뒤 거액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오사카고등법원도 2014년 7월 2심 판결에서 1심 판결을 지지했다.

의외라고 여겨질지 모르겠으나 한국에서 극우라고 여겨지는 일본 정치인도 혐오 발언엔 비판적이다. 예를 들면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발언으로 비난을 받은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은 혐오 발언에 대해 “지나쳐서 문제”라며 “표현의 자유를 넘어섰다”고 규탄했다. 혐오 발언 피해자의 소송 비용을 오사카시가 대신 부담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2020년 올림픽을 준비 중인 마스조에 요이치 도쿄도지사로부터 혐오 발언을 규제할 법안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자 자민당 내에 대책반을 꾸렸다. 9월엔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가 일본 정부를 향해 혐오 발언 규제 법안을 권고하는 최종견해를 공표하는 등 외압도 강해진다.


그러나 혐오 발언 법 규제를 둘러싸고는 일본 국내에선 보수 세력뿐 아니라 진보 세력에서도 신중론이 우세다. 무엇이 차별적 표현에 해당하는지를 정부가 판단하면 국회 앞의 원전 반대 시위 같은 것도 규제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이 씨는 개인이 소송을 제기하면서까지 혐오 발언에 맞서는 건 너무 부담이 크다는 점에서 법 규제에 원칙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무조건 찬성할 수는 없다”고 그녀는 말했다. 정부가 소수자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까지 규제 대상에 넣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법 규제엔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혐오 발언이 잇따르는 시위 현장에 여러 차례 가보고 피해자가 받은 공포나 굴욕을 취재하다 보니 인종차별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고 보호할 가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으로 규제하더라도 음지로 숨을 뿐이라는 지적도 나오지만, 그럼에도 이제 법 규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시기가 왔다고 본다.

1142호 (2012.06.18)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