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디플레이션 걱정에 재정통합 논란까지 

영국, EU 탈퇴 움직임 독일·프랑스·이탈리아도 제로 성장 늪에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추가 양적완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흔들리는 유럽연합 경제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진 유럽 경제를 살리기 위해 유럽중앙은행(ECB)이 팔을 걷어붙였다. ECB는 9월 4일(현지시간) 통화정책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종전의 0.15%에서 0.05%로내렸다. 일본의 0.1%보다도 낮은 사상 최저 수준의 기준금리다. 유동성 공급 확대로 디플레이션을 잡겠다는 의도다. 이미 유로화 가치는 최근 1년 이래 최저 수준까지 내려갔다. 마리오드라기 ECB 총재는 추가 양적완화 가능성도 시사했다. ECB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지는 미지수다. 양적완화의 설계자로 알려진 리하르트 베르너 영국 사우샘프턴대 교수는 “시중은행의 신용공급이 너무 줄어든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돈을 시중은행에 주입한다고 해도 효과가 없다”면서 “유로존이 1990년대 일본과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고 우려했다.

제조업 장기 불황 조짐

유럽이 흔들리고 있다. 유럽 경제 중추인 유럽연합(EU) 주요 회원국들은 유로존 위기 여파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과 함께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제재 조치를 취하면서 산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제조업 분야까지 타격을 입고 있다. 수출 감소와 기업들의 투자심리 위축으로 제조업에서 장기 불황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유로존의 8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50.7에 그쳤다. 전월의 51.8에서 더 내려간 수치로 4개월 연속 하락세인 동시에 13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유로존의 올 2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0%로 제로 성장에 머물렀다.

지난 1993년 EU 출범 당시 세계 거시경제 전문가들은 유럽경제에 대해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에 여념이 없었다. 미국·일본·캐나다와 G7(Group of 7)을 이루는 독일·프랑스·영국·이탈리아가 EU 구성원으로 건재한 가운데 이들을 중심으로 뭉친 EU 단일시장이 세계 경제에 가져온 파급력은 대단히 컸다.

EU 주요 회원국 역시 EU 출범으로 쏠쏠한 경제적 이득을 챙겼다. 올 7월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EU 최대 경제국인 독일은 EU 단일시장에 대한 수출 증가와 외환 비용 절감 효과에 힘입어 992~2012년 사이 GDP가 평균 2.3% 증가했다. 덴마크도 같은 기간 국민 1인당 연간 소득이 500유로 증가하며 ‘EU 효과’를 누렸다.

그러나 지난 몇 년 사이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다. 최근 영국에서 EU 탈퇴 목소리가 커진 것은 EU의 경제 위기가 그만큼 심각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국은 EU 집행위원회의 재정통합 추진과 EU 예산 증액에 대한 반감으로 EU 탈퇴 논의를 본격화하고 있다. 올 7월에 차기 EU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된 장클로드 융커 전 룩셈부르크 총리는 EU 회원국의 경제적 자율성보다 재정규율 강화를 통한 강력한 EU 통합이 중요하다고 보는 대표적인 통합론자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이에 반발하며 EU 탈퇴 의사를 내비친 바 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스웨덴 등도 부정적 입장이다.

융커를 지지하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재정규율을 완화할 수 있다”며 다른 회원국 어루만지기에 나섰지만 반발이 만만치 않다.




*전분기 대비 / 자료: EU
앞서 2012년 영국과 체코를 제외한 25개 EU 회원국은 재정규율을 강화해 유로존 위기와 같은 또 다른 재정위기를 막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새 재정협약에 서명해 지난해 1월 발효했다. 이로써 EU 집행위원회는 회원국의 예산 수립에서부터 재정운용 전반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됐다. 강력한 재정규율로 EU의 경제적 통합을 한층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것이 독일과 차기 EU 집행위원회의 의중이지만 회원국들의 계속된 반발로 쉽지 않을 전망이다. 디플레이션과 러시아 제재 이슈에다 EU의 재정통합에 대한 논란까지 불거지면서 유럽 경제는지금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다.

EU 주요 회원국들은 심각해진 경제 상황 속에 EU의 긴축정책이 눈앞에서 더 큰 고통을 유발한다고 보고 있다. 프랑스는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극심한 저성장과 높은 실업률의 늪에 빠지면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하는 국정 운영으로 집권 초기 고소득층에게 75%의 소득세를 내게 하는 과세법을 추진하다가 위헌 판결을 받기도 했다. 경제난이 심화되자 결국 지난해말 200억 유로, 올 초 300억 유로 규모의 기업 감세안을 각각 내놓으며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올 2분기 프랑스 GDP 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0%로 나아질 기미가 없다. 2분기연속 제로 성장이다.

이탈리아 사정도 비슷하다.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는 9월 10일(현지시간)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올해 이탈리아 GDP 성장률이 0% 안팎에 머물 것”이라며 비관적으로 전망하면서 “제로 성장은 경기 침체의 끝이 아니라 경기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실제 이탈리아 통계청에 따르면 올 2분기 이탈리아의 GDP 성장률은 전분기보다 0.2% 감소했다. 렌치 총리는 정부 지출을 줄이면서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실업률을 낮추겠다고 밝힌 바 있지만 갈 길이 멀어 보인다.

EU 맏형격인 독일은 유럽의 재정위기 이후로도 비교적 선방한 나라이지만 최근 상황은 썩 좋지 못하다. 독일 통계청에 따르면 올 2분기 독일의 GDP 성장률은 전분기보다 0.2% 감소하면서 지난해 1분기 이후 5분기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등 수출에서 악재가 발생하면서 타격을 입은 결과다. 제조업에서 6월에만 공장 수주가 전월 대비 3.1% 줄었다.

재정위기를 겪은 국가 중 그리스와 스페인은 그나마 회복세라 대조적이다. EU 집행위원회는 올해 그리스의 GDP 성장률이 2007년 이후 최고치인 0.6%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스페인은 관광산업이 호조다. 지난해 스페인을 찾은 관광객 수는 약 6000만명으로 사상 최대 규모였다.

EU의 중심축 기우뚱

이처럼 일부 국가가 회복세에 있기는 하지만, EU의 중심축인 독일·프랑스·영국·이탈리아의 고전은 유럽 경제 전반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지금 상황에서 EU 자체가 살아남지 못할 수 있다며 강력하게 경고하기도 한다. 한계에 다다른 EU가 회원국들의 단결을 이끌어 장기 불황 극복을 모색할 때라는 것이다. 미국의 투자자 조지 소로스는 올 3월 BBC와의 인터뷰에서 “유럽에서 경제 위기가 이어지고 있지만 EU의 위기대응력은 의심스럽다”며 이같이 지적했다.

소로스는 “유로존 위기로 EU 회원국들의 관계가 채무자와 채권자 지위로 변질됐다”면서 “경기 침체를 극복했던 단일 국가들과는 달리 EU는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EU의 실질적 리더인 독일이 긴축정책의 문제점을 깨닫고 정책 방향을 수정해 EU의 위기 극복을 이끌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1253호 (201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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