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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욕의 한국 영화 110년 - 울타리(스크린쿼터) 낮춰도 안방 지키며 흥행몰이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 논란 후 일시적 부진 … 내실 다지고 작품성 높여 경쟁력 강화 




10전. 우리나라 최초로 상영한 영화의 입장료다(당시 쌀 한 가마 가격 약 100전). 보통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출발점을 1903년으로 본다. 서울 동대문의 한 기계창고에서 단편영화를 상영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사진도 신기하던 시절에 사진이 움직이기까지 하니 당시 사람들이 받았을 충격은 짐작할 만하다. 1908년 이 기계창고가 광무대로 이름을 바꾼 데 이어 우미관·단성사 등 정식 상영관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대중 속을 파고들기 시작한 건 이맘때부터다.

극장은 늘었지만 1920년까지만 해도 상영작들은 프랑스 등지에서 수입된 외화였다. 최초의 한국 영화는 1923년 만들어진 윤백남 감독의 <월화의 맹서>라는 게 정설이다. 이로부터 3년 뒤엔 한국 영화계의 대부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이 개봉했다. 소작농 가족이 겪는 고통과 복수를 그린 이 영화는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아리랑> 이후 영화계엔 대중성을 갖춘 작품이 속속 등장했고, 현재의 제작사 개념인 독립 프로덕션도 크게 늘었다. 일제의 통제와 탄압으로 침체했던 한국 영화는 해방과 함께 본격적인 산업화를 시작했다.

<하녀> <오발탄> <만추> 수작 쏟아진 1960년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흥망성쇠를 반복한 한국 영화의 첫 중흥기는 1960년대였다. 국민 1인당 영화관람 횟수가 연간 5회(2013년 4.25회)를 넘어설 정도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영화를 제외하곤 별달리 문화생활을 즐길 방법이 없었던 이유가 컸다. 보는 사람이 많으니 만드는 사람도 신이 났다. 1950년대 초 연간 10편 정도에 머물던 제작 편수는 1969년 200편을 넘어섰다.

물론 그 이면엔 연간 15편을 제작해야 영화업을 할 수 있도록 한 군사정권의 규제가 있었다. 대량 생산 체제에도 양적인 성장만 이룬 건 아니었다. <하녀> <오발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만추> 등 지금도 명작으로 꼽히는 다수의 영화가 이 때 나왔다. 신상옥·김기영·이만희 등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기도 했다.

잘 나가던 한국 영화는 1970년대 들어 침체기에 접어든다. TV라는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 때문이었다. 1961년 한국방송공사(KBS)가 개국했고, 1966년엔 금성사(현 LG전자)가 첫 보급형 흑백 TV를 내놨다. 당시 이 제품의 출시 가격은 6만3510원. 당시 쌀 한 가마가 2500원 정도였고, 생산직 근로자의 1년 연봉이 약 7만원 정도였으니 TV를 소유한 집이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 근로자의 소득 증가와 저가 TV 보급이 맞물리면서 TV는 엄청난 속도로 거실을 점령해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만 해도 전국 TV 보급은 약 10만대에 불과했지만 1977년 400만대를 돌파했다.

TV가 잠재적 영화 관객을 집에 묶어두면서 제작 편수가 줄었고, 장사가 안 돼 몇몇 극장이 문을 닫는 일도 있었다. 저예산으로 제작하다 보니 장르도 청년영화나 멜로영화 등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컬러 TV 보급이 시작된 1980년대에는 연간 영화 관객 수가 4000만명대로 추락할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처했다. 군부 통치에 따른 과도한 검열 제도 역시 영화의 인기를 떨어뜨린 요인 중 하나였다. 제작 환경이 나빠지자 외국 영화의 강세가 이어졌다. 1970~80년대는 가요보다 팝송을 많이 듣던 시기였는데 외국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던 시대적 분위기도 한 몫했다. 이러한 한국 영화의 불황은 1990년대 중반까지 계속 이어졌다.

분위기 반전에 성공한 건 1990년대 말이었다. 대규모 자본을 투자해 만드는 ‘한국형 블록버스터(Blockbuster)’가 등장한 것도 이 즈음이다. 1999년 2월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쉬리>를 빼놓을 수 없다. 순수 제작비 24억원, 3000여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한 <쉬리>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활용한 폭파 장면 등 이전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화려한 볼거리로 무장했다.

최민식·송강호·한석규 등 최고의 배우들이 동시에 출연한 영화이기도 했다. 그 해 582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쉬리>는 세계적인 흥행작 <타이타닉>의 국내 흥행기록을 깨고 한국 영화사상 최다 관객 동원의 기록을 세웠다. 지금도 역대 박스오피스 41위에 올라있다. 역대 박스오피스 100위 중 2000년 이전에 개봉한 영화는 <쉬리>가 유일하다.

경쟁력을 갖춘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한 한국 영화는 이후 제2의 르네상스를 맞았다. 일단 50%대의 관객점유율을 회복했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곽경택 감독의 <친구>,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 등 매년 수작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 영화들은 흥행에도 성공했다. 대기업들이 연이어 영화 제작에 뛰어들면서 제작비 조달 환경이 개선됐고, 과거엔 제작을 꺼렸던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는 분위기도 조성됐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늘면서 관람 환경이 크게 개선된 덕도 봤다.

‘스크린쿼터 축소→한국 영화 궤멸?’ 주장 틀려

내용도 알찼다. 지금 우리나라 영화계를 상징하는 감독이 대거 등장한 시기였는데 박찬욱·봉준호·이창동·김지운·홍상수·김기덕 등이 대표적이다. 분야와 스타일은 달라도 저마다의 영역에서 창조성과 연출력을 인정받은 감독들이다. 칸·베를린 등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연이어 수상 소식을 전해올 만큼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감독들이 동시대에 함께 활동하면서 한국 영화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쑥쑥 커 나가던 한국 영화는 2007년 또 한번 성장세가 꺾였다. 60%를 넘어섰던 관객점유율은 2007년~2010년 4년 연속 40%대에 머물렀고, <해운대>를 제외하곤 이렇다 할 대작도 나오지 않았다. 스크린쿼터 축소의 효과라는 지적이 나왔다. 사실 한국 영화의 성장 과정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바로 ‘스크린쿼터’다.

1966년 처음 도입된 스크린쿼터는 극장에서 특정일 이상 국산 영화의 상영을 의무화하는 제도다. 기반이 약한 한국 영화를 보호하기 위한 취지였다. 이면엔 외국 영화 수입을 제한해 국민들의 사상을 통제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숨어 있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가 지금도 스크린쿼터제를 활용하고 있다.




투자수익률 2년 연속 10%대로 개선

우리나라의 경우 도입 당시 연간 90일로 정한 뒤 축소와 확대를 반복했고, 1985년 연간 146일로 정해진 게 계속 이어져왔다. 문화부장관과 각 지방자치단체장이 20일씩의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어 실제로는 연간 106일 정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극장들이 지키지 않는 사례가 많아 스크린쿼터 감시단이 활동하기도 했고, 실효성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국론 분열 사태로 확대된 건 2006년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스크린쿼터 폐지 또는 축소를 요구했는데 노무현 정부에서 이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영화계는 즉각 반대에 나섰다. 한국 영화가 성장한 건 맞지만 시장을 개방할 만큼 안정적인 기반을 갖춘 게 아닌 만큼 당분간 더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면 엄청난 자본을 무기 삼아 할리우드 영화가 우리나라 극장가를 휩쓸것이란 예측도 많았다. 배우와 감독 등 유명 영화인들이 거리로 나와 몇 달 동안 시위를 이어갔다. <명량>에서 이순신 역을 맡아 사상 첫 ‘2000만 배우’의 꿈을 꾸게 된 최민식은 당시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에 가장 강력히 항의했던 배우 중 하나였다. 항의의 뜻으로 2004년 <올드보이>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뒤 받은 문화훈장을 반납하기도 했다.

논란 끝에 ‘절반 축소’로 가닥이 잡혔고, 지금은 연간 상영일수의 5분의 1(73일) 이상 한국 영화를 상영한다는 내용으로 시행령이 바뀌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한국 영화는 여전히 잘 나간다. 보호를 받던 때보다 관객점유율은 오히려 더 높다. 할리우드 대작이 한국 영화를 피해 개봉일을 잡을 정도로 힘도 세졌다. 그 사이 ‘문화 주권’을 빼앗기는 것이라며 강력 반발했던 목소리는 사라졌고, 스크린쿼터가 아예 폐지된 줄 아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지금은 ‘장벽을 낮출 경우 해외 사업자들에게 시장을 빼앗긴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사례로 자주 사용된다.

그러므로 2007년 이후 약 5년 동안 한국 영화가 침체에 빠진 이유를 스크린쿼터 축소에서 찾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 당시의 침체는 스크린쿼터와 무관하게 제작 환경을 둘러싼 영화계의 고질적인 병폐가 수면위로 드러난 결과였다. ‘묻지마 투자’ ‘과잉 투자’의 부작용이었고, 투자수익률이 -40%대를 기록할 만큼 내실이 없던 탓이었다.

상황은 심각했다. 제작 편수가 크게 줄어 제작·배급·상영 산업 전반이 동반 침체를 겪었다. 가뜩이나 취약한 영화계 고용 문제가 불거졌고, 우수한 제작 인력이 이탈하면서 부정적 연쇄효과를 낳았다. 흔히 영화를 경제가 불황일수록 호황을 누리는 산업으로 보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지갑을 닫은 소비자들은 극장에도 덜 갔다. 만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함께 줄어든 1970~80년대 침체기와 유사했다.

분명한 위기였지만 대처는 과거와 달랐다. 영화인들은 불만을 토로하는 대신 자구노력을 시작했다. 참신한 기획을 발굴하고, 제작 과정에서 누수를 줄여 나갔다. 제작자는 더 신중하게 작품을 고르고, 투자자도 따질 건 따지는 문화가 형성됐다. 영화 제작 밀도가 더욱 높아지자 신규 투자가 들어왔고, 좋은 작품이 연이어 시장에 나왔다.

침체기는 짧았다. 2012년 관객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한국 영화 관객 1억명 시대’를 열었다. <도둑들>과 <광해:왕이 된 남자>가 12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흥행을 이끌었지만 400만 이상을 동원한 영화가 9편이나 될 정도로 저변이 탄탄해진 게 예전과 달라진 점이다. 관객점유율은 58.8%로 크게 올랐고, 극장 매출은 1조4551억원으로 2011년보다 17.7% 늘었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수익성이 개선된 점이었다. 2012년 개봉한 한국 영화 174편 가운에 제작비 10억원 이상, 스크린 수 100개 이상을 확보한 상업영화 70편의 투자수익률은 약 13.3%였다. 2005년 7.9%를 기록한 이후 7년 만의 흑자 전환이었다. 영화 수익성의 잣대인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총 22편으로 전체의 31.4%를 차지했다. 투자수익률 100%를 넘은 작품도 12편이나 됐다.

2013년은 더 좋았다. 상업영화 63편의 투자수익률이 15.2%로 2012년보다 1.9%포인트 증가했다. 2002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설국열차> 등의 해외 매출 수익이 반영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더욱 높아질 수 있다.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19편으로 전체의 약 30.2%였고, 투자수익률 100%를 상회한 영화도 8편 있었다.

배급 3강 구도 깬 NEW의 등장

신생 배급사의 등장도 반가운 이슈였다. 지난해 영화계에선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NEW)가 내내 화제였다. NEW는 연초 <7번방의 선물>로 1000만명 동원에 성공하더니 연말에는 <변호인>으로 다시 대박을 쳤다. 2009년 설립 이후 한 자릿수에 머물던 점유율은 2012년 11.8%(매출 기준)로 올랐고, 지난해엔 18.1%로 2위에 올라 배급 3강(CJ·롯데·쇼박스) 구도를 깨는데 성공했다.

독보적인 1위였던 CJ E&M(21.2%)을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을 보유한 것도 아니고, 대기업 계열사도 아닌 신생 배급사의 성공은 매우 이례적이다. 올해는 약간 주춤한 편이지만 메이저 투자 배급사의 숫자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크다.

여러 면에서 볼 때 한국 영화의 강세는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12월 열린 한국영화산업 결산 좌담회에서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는 “어느덧 ‘한국 영화 재미있다’는 인식이 대중 안에 자리를 잡았다”며 “잘 만들어지고, 대중이 이에 대한 믿음을 갖기 시작한 게 한국 영화가 최근 잘 되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말했다. 여건도 좋다. <명량>의 기록적 흥행덕분에 40%대로 떨어졌던 관객점유율을 51%로 끌어올렸고, 남은 하반기에도 기대작이 줄줄이 대기 중이라 지난해 수준은 무난히 달성할 것이란 관측이다.

1251호 (201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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