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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 위기 늪에 빠진 토종 제화 업체 - 트렌드 변화 못 읽고 상품권만 남발하더니… 

EFC(에스콰이아) 결국 법정관리 … 금강제화·엘칸토도 실적 부진에 속앓이 


▎롯데백화점 부산 본점에서 여성 고객들이 한 해외 브랜드의 구두를 살피고 있다. 소비문화가 바뀌고 외국산 브랜드를 찾는 소비자가 늘면서 토종 제화 브랜드들이 고전을 면치못하고 있다.



절도 있게 차려 입은 상하의에 갖춰 신은 단정한 단화. 우리나라 공군이나 해군을 떠올릴 때 연상되는 모습이다. 여기서 군인들이 착용한 단화가 바로 국내산인 에스콰이아 제품이다. 군용 구두를 만들어 매년 수십만 장병들에게 보급할 만큼 에스콰이아는 국민들이 신뢰하는 토종 제화 브랜드였다. 그런 에스콰이아가 최근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에스콰이아 구두 제조업체인 EFC가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한 것이다. EFC는 7월 30일 “법정관리를 신청해 회사의 경영 정상화를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앞서 EFC는 올 2월 대주주인 사모펀드 H&Q AP코리아가 저축은행 대출금 만기 연장에 실패하면서 3월에 주채권은행인 KB국민은행 등에 신규자금 지원과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개시를 신청했다. EFC는 회사가 소유한 부동산 자산의 매각 등을 골자로 한 경영 정상화 이행 방안을 채권단에 제시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채권단은 7월 29일 워크아웃 진행을 위한 부의 안건 결의에서 최종 부결 처리했다. EFC 관계자는 “지난 넉 달 동안 채권단과 계속 협의했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며 “워크아웃 진행이 어려워 불가피하게 최종 수단인 법정관리 신청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가 갚아야 할 부채는 총 1000억원 규모다.

채권단 결정으로 워크아웃 진행 무산

통합도산법에 따라 진행되는 법정관리는 워크아웃보다 고강도의 기업 구조조정 방식이다. 법원이 기업의 회생 혹은 파산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채권단이 워크아웃 대신 법정관리 쪽을 택한 것은 EFC에 자금을 더 지원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협의 과정에서 대주주가 회사를 살릴 의지를 보이지 않아 자금 지원이 더는 어렵다는 결론을 냈다”고 전했다. 애당초 대주주 측은 회사 매각을 전제로 채권단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나섰지만, 금융권에 따르면 마땅한 인수후보군이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후폭풍은 거세다. EFC의 협력업체 98곳은 8월 4일 경기도 성남시민회관에서 찬반 투표를 벌인 끝에 법무법인 태우를 법률 대리인으로 선정하고 집단소송에 나서기로 했다. 소송 대상은 EFC와 그 대주주, 그리고 채권단이다. 협력업체들은 EFC와 대주주 측이 채권단으로 하여금 법정관리 결정을 내리도록 고의로 유도했다고 주장한다. 정용철 EFC 협력업체 대표는 “EFC와 대주주 측이 3월에 신규자금 지원을 요청하면서 워크아웃 진행이 한 차례 부결됐는데도 다시 신규자금을 지원해달라고 한 것은 고의로 법정관리까지 가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EFC가 2011년부터 협력업체들의 납품대금 결제 방식을 전자어음에서 외상매출채권 담보대출로 변경했을때, 대출금 상환 의무가 협력업체들에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은 채권단에 대해서도 소송을 진행하기로 했다. 전자어음과 달리 외상매출채권 담보대출의 경우 채권 발행 업체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채권을 판 업체가 대출금 상환 의무를 지게 된다. 이번 법정관리 신청 결정으로 EFC 협력업체 160곳은 총 289억원의 납품대금을 은행에 상환해야 하게 됐다. 회사 빚 일부를 협력업체들이 떠안게 된 구조다.

1961년에 설립된 에스콰이아는 1954년 창립된 금강제화, 1957년 탄생한 엘칸토와 함께 3대 토종 제화 브랜드로 꼽힌다. 이들 브랜드는 수십 년 간 승승장구했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점차 사정이 나빠졌다. 에스콰이아는 경영난 속에 2009년 H&Q AP코리아가 인수하고 2011년 사명을 EFC로 바꾸면서 재도약을 노렸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이 회사의 영업이익은 2010년 72억원에서 2011년 39억원으로 반 토막이 났다. 급기야 2012년에는 53억원, 지난해는 62억원의 영업손실을 각각 기록했다. 판매량이 급감하자 신세계백화점이 2012년에 강남점 등 주요 매장에서 퇴출 결정을 내리는 등 유통 업계도 서서히 외면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230명의 직원을 희망퇴직 처리해 노조가 파업에 나서기도 했다.

엘칸토 역시 외환위기 직후 부도 처리된 다음 잠시 살아났다가 2004년 다시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등 험난한 세월을 겪어야했다. 그 사이 대주주는 모나리자(2005년)로, 이랜드(2011년)로 바뀌었지만 현재까지 자본잠식 상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0년 단위로 짚어보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엘칸토의 지난해 매출은 310억원으로 10년 전인 2003년 748억원에서 반 토막이 났다. 부동의 업계 1위 자리를 지켜온 금강제화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지만 실적이 10년 사이 눈에 띄게 나빠진 것은 마찬가지다. 2003년 4493억원에서 지난해 3485억원으로 매출이 감소했다.

외환위기만 문제였을까. 소비자와 전문가들은 토종 제화 브랜드가 최근 10여년 간 급변한 국내 소비문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고 지적한다. 한 대형 포털사이트 패션 관련 카페 회원인 정상주(34)씨는 “조금만 더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면 인터넷에서 해외 직구(직접구매)로 ‘처치스’나 ‘크로켓앤존스’ 같은 고품질 수제화를 얻을 수 있는데 굳이 ‘노티’가 나는 토종 브랜드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2000년대 들어 외국산 유명 브랜드들이 온라인에서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모으면서 주요 백화점들이 잇따라 외국산 구두를 취급하는 편집숍을 마련한 것이 바뀐 소비문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최근 늘어난 가치소비 풍토도 이런 분위기에 한몫을 한다. 이전까지 구두를 단지 ‘신고 다니는 것’ 정도로 인식했다면 지금은 ‘패션의 중요한 부분’,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할 아이템’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소비자들이 그만큼 우수한 품질과 끌리는 디자인을 갖춘 외국산 브랜드로 눈을 돌렸다는 이야기다.

‘ 노티’ 패션으로 현실 안주하다

그 사이 토종 제화 브랜드는 구두상품권을 남발하고 할인율을 높이는 데 급급하다가 정작 중요한 제품 가치를 끌어올리는 데는 실패했다는 지적이다. 품질과 디자인 개선이 근본적 해결책임에도 눈앞의 손익에 현혹돼 이를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관련업계 한 전문가는 “1994년 백화점상품권 등장 이후 각 업체들이 구두상품권을 헐값에 판매하면서 할인율이 높아지고 제품가치는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며 “1980년대 때처럼 구두상품권에나 의존하려고 한 안일한 대응이 위기를 키운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른 전문가는 “소비자들이 뭘 원하는지를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라며 “더 이상 애국심 마케팅만으로는 어렵다는 걸 비단 제화 브랜드뿐 아니라 자동차·식음료 등 소비재 산업 전반에서 깨달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통합도산법 : 파산 위기에 빠진 기업과 개인 채무자들의 회생을 돕기 위해 마련된 법률. 기존의

도산법은 회사정리법, 파산법, 화의법, 개인채무자회생법 등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2006년 4월부터 통합됐다. 정식 명칭은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이다.

1251호 (201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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