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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이사의 두 얼굴 - 재벌 계열사에선 ‘거수기’ ... 주인 없는 회사에선 ‘新실세’ 

 

박상주 이코노미스트 기자
238개 상장사 이사회 부결된 안건 0.07% … 포스코·KT 등에선 사외이사 파워 막강



회사 돌아가는 사정도 모르면서 이따금 들러 공짜 점심 먹는 ‘뜨내기 임원’, 이미 정해진 사업계획서에 영혼 없이 사인만 하는 ‘비싼(고액 연봉) 거수기’, CEO의 지인이나 오너의 친구로 구성된 ‘낙하산 부대’…. 기업 안팎에서 사외이사를 두고 이르는 비아냥이다.

CEO의 전횡을 감시하고 전문가로서 경영에 조언을 해야 하는 사외이사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해마다 주주총회에서 사외이사가 선임될 때마다 같은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그 때뿐, 달라진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사외이사를 두고 가장 흔하게 일컫는 말은 ‘비싼 거수기’다. 사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검토 없이 대표이사 손만 들어준다는 것이다.

특히 재벌그룹 계열사 사외이사가 ‘거수기’라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이미 오너 등이 사업계획을 지시해놓고 대표이사가 정밀하게 시행계획을 모두 맞춘 뒤라 사외이사가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재벌그룹 대기업에서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A 교수는 “사외이사를 선임하기 위해 수백 장의 이력서를 받아서 검토하는 일을 한다”면서 “하지만 실제로는 오너나 CEO 몫으로 두어 명의 사외이사 자리를 빼어놓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너 추천으로 들어온 사외이사는 회의 전후에 다른 사외이사에게 회사 입장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자임한다”면서 “어떤 사외이사는 자신이 오너의 친구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떠들고 대표이사는 그에게 쩔쩔 매는 모습을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사외이사가 이사회 안건에 반대의견을 내는 경우는 드물다. 일부 사외이사는 1년에 4번 정도 열리는 정기 이사회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실제로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계열사 부당지원 의혹을 받고 있는 안건에 찬성표를 던진 경우도 흔하다. 그럼에도 보통 6000만원 안팎의 연봉을 받는다.

2012년 5월 1일~2013년 4월 30일 사이에 대기업 집단 상장사(238개사)의 이사회 안건은 모두 6720건. 이 중 사외이사 반대 등으로 원안대로 가결되지 않은 안건은 25건(0.37%)이었다. 부결된 안건은 5건(0.07%), 부결되지는 않았지만 사외이사가 안건에 영향력을 행사한 경우는 20건(0.3%)에 불과했다.

사외이사가 안건에 거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 사외이사는 분기별 정기 이사회나 특별 안건에 따라 개최되는 임시 이사회에 ‘참석’만 하면 된다. 경영성과 보고를 듣고 사업계획에 사인만하면 임무가 끝난다. 현재 재벌기업 계열사 사외이사 2년차인 B변호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가 오너 친구인데 말이야”

“오전 10시에 이사회를 시작해 1시간 정도 이야기를 듣고 나가는데, 말 한마디 안 하고 나가면서 회의록에 사인만 하면 모든 일이 끝납니다. 고급 식당에 몰려가서 이른 점심을 먹고 헤어지고 나면 ‘변호사라고 날 불러놓고는 조언 한 번 듣지 않는데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지?’라는 자괴감마저 듭니다. 이사회를 하고 나면 자존심이 상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외이사들은 회의 전에 잡담하고 식사하면서 골프 이야기하는 것 외에는 한번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어떤 사외이사는 이사회 내내 눈을 감고 있다가 졸기도 합니다.”

사외이사는 이사회에서 발언권이 있다. 권리이기도 하지만 사업계획 등을 검토해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발언하지 않을까? B 변호사는 사외이사가 이사회의 내용을 거의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안건을 회의 전에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어떻게 보고와 계획에 대해 가타부타 말할 수 있겠습니까? 회사에서도 회의에 참석하실 수 있느냐는 것만 묻습니다. 자료를 미리 달라고 하면 ‘와보시면 안다’거나 ‘이미 정밀하게 검토한 거고 큰 이슈나 문제는 없다’, ‘미리 보시면 일만 더하시게 되지 않겠느냐’고 합디다.

회의 당일 대표이사가 대본을 읽을 때 내용을 처음 듣거든요. 사외이사 자리는 굳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인데 누가 대표이사나 이사회 의장 이야기에 반하는 자료를 찾거나 구하려고 하겠습니까? 설령 제대로 일 좀 해보려고 하면 주변에 다른 이사들이 눈치를 줍니다. 한 마디로 튀지 말고 주는 돈이나 챙기라는 거죠.”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재벌그룹 계열사처럼 주인이 있는 회사에서 사외이사 활동은 소극적인 편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한 2013년 사외이사 출석률을 보면 ‘총수가 있는 집단’과 ‘총수가 없는 집단’ 사이 차이가 드러난다. 대기업 집단 상장사(238개사)의 지난해 이사회 사외이사 비중은 48.7%. 이 중 총수 없는 집단(49.6%)이 총수 있는 집단(48.6%)보다 1.0%포인트 사외이사 비중이 높다.

전체 사외이사의 이사회 참석률은 91.1%. 이 중에 총수 없는 집단의 이사회 참석률(95.0%)이 총수 있는 집단(90.7%)보다 4.3%포인트나 높았다. 회사별로 보면 한국투자금융과 에쓰오일 사외이사 출석률은 100%였다. 이와 달리 재벌총수의 입김이 센 동양(59.0%)·이랜드(70.8%)·한진중공업(71.2%) 순으로 출석률이 저조하게 나타났다. 상장사 사외이사 중 이사회 출석률이 ‘0’인 것도 78곳에 94명이나 됐다. 이트론의 사외이사 4명은 전원 출석률 ‘0’를 나타내기도 했다.

“미리 읽어 보시면 머리만 아픕니다”

주인 없는 회사에서 사외이사는 ‘그림자 권력’으로 불린다. 사내관계로부터 독립적인 입장에서 경영 판단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외이사가 마치 회사의 주인행세를 할 수 있는 구조다. 국민연금이 최대주주인 포스코는 지난해에만 3건의 안건을 수정 의결했다. 사외이사들이 영업보고서와 재무제표에서 주당 현금배당액을 수정토록 요구했다. 또 매도한 산소공장 매도가액 표기를 명확히 하도록 했다. 포스코 사외이사들은 차기 경영자를 뽑는 과정에서 승계위원회를 운영해 CEO선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정부가 주인인 강원랜드 사외이사들은 실무진 반대의견을 묵살하고 부실기업에 돈을 빌려줬다가 150억원의 손실을 입히기도 했다. 최근 황창규 회장으로 사령탑을 바꾼 KT도 사외이사의 입김이 강한 곳이다. 황 회장은 새로 선임된 사외이사 5명 중에 자신이 추천한 인물을 한 명도 넣지 못했다. 새 사외이사 후보로 30여명을 후보추천위원회에 올렸지만 다른 사외이사의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KT의 한 사외이사는 “우리가 결정해주지 않으면 황 회장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사외이사 반대로 황창규 회장 추천 사외이사 탈락

특히 특정한 주인이 없는 금융회사에서 사외이사의 권한은 막강하다. 사외이사들이 똘똘 뭉쳐 상호 추천으로 스스로 연임을 결정한다. 사외이사가 사외이사를 뽑기 때문이다. KB금융 사외이사들은 2012년 말 ING생명 인수 안건을 부결시켜 경영자들을 곤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실제로 2010년 만들어진 은행권 사외이사 모범규준은 사외이사 임기를 3년으로 하고 1년씩 2번 연임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하지만 대부분 금융권 사외이사는 활동 내용과 관계없이 5년까지 연임하는 것을 관행으로 고착화시켜 놓고 있다. 경영자보다 더 긴 임기를 보장받은 사외이사들이 스스로 권력기구화 되는 것이다. 경영자가 추진하려는 사업을 방해하는 한편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을 누리면서 자신들의 보수를 스스로 끌어올리는 식이다. 심지어 금융위원회까지 나서 금융권 사외이사의 권한 집중이 과도하다며 사외이사 연임을 제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을 정도다.

롯데하이마트에서 2년차 사외이사를 하고 있는 고려대 경영대학 문형구 교수는 “사외이사는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기업이 잘 돌아가도록 독립적인 감시역과 전문적인 자문역을 병행해야한다”며 “경영자가 힘들게 만들어놓은 안건을 부결하기 전에 전문적인 식견을 동원해 보완·보류·재논의 할 수 있도록 문제점을 찾아내고 이를 함께 해결해 가결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교수는 또 “특히 계열사 간 거래나 경영자 선임, 경영권 분쟁 등이 발생하면 사외이사가 적극적으로 나서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며 “사외이사는 기업과 기업을 둘러싼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지 기업을 쥐고 흔들거나, 경영자에게 휘둘리기 위해 선임된 사람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1233호 (201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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